'52시간 시대' 개막…'회식 절벽' vs '워라밸 효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1일 오후 서울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에 영업시간 변경을 알리는 게시물이 붙어 있다. 신세계 백화점은 본점과 강남점을 제외한 전점의 개점시간을 기존 오전 10시30분에서 11시로 30분 늦춘다. 이번 영업시간 변경은 주 35시간 근무 등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ㆍ일과 삶의 균형)’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시행했다. 2018.7.1/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7월 1일부터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되면서 ‘주52시간 근로’시대의 막이 올랐다. 세계 두번째 장시간 노동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강행 규정이기 때문에 법정 근로시간 40시간과 휴일근로를 포함한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해 주당 52시간 이상 일할 수 없다. 만약 시간을 초과하면 사업주는 징역 2년 이하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당장 근로자의 삶과 직장문화는 물론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의 파고가 몰려올 전망이다. 근무시간이 줄고 워라밸(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이른 퇴근과 회식절벽의 여파가 주목된다.

고용부의 근로기준법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내 친목도모를 위한 회식은 근로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들은 회식을 가급적 자제하거나 직원 동의하에 최소한도로 시행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유통 등 일부 업계의 경우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해 유연근무제를 도입, 조기 출근조와 마감조를 분리해 다함께 모이는 회식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업들은 거래처와의 식사나 영업상 접대 역시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최소화하고 가급적 근무시간 내에 대외업무를 마무리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유흥, 외식업계는 일단 부정적 여파가 클 것으로 우려한다.


서울 광화문에서 한우집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안그래도 올해 미투(Me too) 운동 여파로 기업들이 저녁 술자리를 자제해 매출이 줄었는데 이제 주 52 시간제까지 시작되면 단체회식이 끊겨 청탁금지법 시행보다 더 큰 타격을 받게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반기에 주 52시간발 외식업체들의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내달 1일부터 300인 이상 기업들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 29일 서울 성동구 이마트 본점에서 신세계 그룹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직원들의 컴표터 모니터 위에는 '9to5 근무문화 정착을 위한 우리의 약속' 메모가 붙어 있다. 올해부터 주 35시간 근로제를 적용한 신세계 그룹은 PC 오프제를 시행 중이며 매장 영업 시간도 단축했다. 2018.6.29/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만 일각에서는 ‘부어라 마셔라’식의 부정적 회식문화가 사라지는 대신 개인적 모임이나 가족단위 건전한 외식문화가 활성화돼 외식업계에 오히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로 지역 상권별 희비도 엇갈릴 전망이다. 실질임금 감소로 소비여력이 약화되거나 직장 내 회식이 줄면서 오피스상권은 직격타를 입을 수 있다. 광화문이나 여의도, 강남을 비롯해 오피스가 밀집한 ‘주5일 상권’은 당장 매출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으로 주거지 인근 상권은 활성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가족이나 지인들과 친목모임을 갖는 등 신규 소비가 창출될 수 있어서다.

주류업계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회식 빈도가 줄면 아무래도 술 소비량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회식자리에서 자주찾는 소주와 맥주업계는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반면 회식자리가 줄어드는 대신 ‘홈술’ 또는 ‘혼술족’들의 주류소비가 늘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트랜드에 맞춰 수입맥주나 위스키, 와인같은 고급술을 찾는 이들이 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 유통업계에 긍정적인 요인이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현재 주류시장은 가정과 유흥주점이 반반씩 차지한다”면서 “회식이 줄어도 개인모임이나 홈술이 늘어날 수 있는 만큼 당장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예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임종철 디자이너

문화분야에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근무 시간 단축으로 여가가 늘어나는 만큼 퇴근 이후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 8시께야 즐길 수 있던 뮤지컬이나 연극 관람이 최대 1시간 이상 빨라지고 영화관에선 퇴근 시간 직후 많이 볼 수 있도록 대규모 할인 혜택이 제공될 예정이다.

문화계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발맞춰 문화 콘텐츠 업계들이 다양한 프로모션과 콘텐츠 공급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이 실시한 조사에서 여가에 하고 싶은 것에 취미 활동과 문화·예술 관람이 2·3위로 꼽힌 만큼 앞으로 늘어날 문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규모 공연장들은 주 52시간 근무가 바꿀 사회 풍경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공연 수요가 늘어날 경우 콘텐츠를 늘리거나 다양화하는 방식을 물론, 시간대를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가량 앞당기는 문제를 논의 중이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전년도에 체결된 계약 공연들이라 당장 7월부터 바뀌는 것은 없다”면서 “여가 증대, 문화 향유 계층 확대 등 사회 변화에 관심을 두고 내년도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잡힌 ‘계획’을 수정하기 어려운 문화 단체들은 할인을 통해 ‘저녁이 있는 삶’에 동참하고 있다. 이달 2일부터 8월 30일까지 ‘칼퇴 적응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CGV는 약 20% 할인 가격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세종문화회관은 ‘한夜(야)광’ 패키지를 통해 할인 행사를 펼친다.

CJ CGV의 황재현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주 5일제처럼 주 52시간 근무 도입으로 영화관을 찾는 관람객이 증가할 것 같다”며 “현실적으로 상영 시간을 조정하기 어렵지만, 할인 혜택을 통해 ‘퇴근 후 여가’를 더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주 52시간 근무제의 근로 시간 단축이 문화생활 확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2000년 주 35시간 근로제를 시행한 프랑스는 시작 단계에서 ‘행복한 프랑스’와 ‘최악의 법안’ 두 주장이 맞서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주 35시간’은 재정 투입과 노사 공조 속에 연착륙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일자리 35만 개가 새로 생겨나며 실업률 문제도 개선됐다.

프랑스 조사통계국이 최근 발표한 ‘주 35시간제가 프랑스인 생활에 미친 영향 평가’를 보면 ‘휴식시간’에서 좋아졌다(52.9%)가 나빠졌다(19.3%)보다 3배 가까이 높았고 ‘정기 휴가 제공’ 부문에서도 좋아졌다가 70.7%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또 35시간 근무로 2000년 이후 전체 인구의 46%가 법 시행 이전보다 더 많은 책과 음반을 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프랑스의 대표 서적 및 음반 유통기업인 프낙은 2000년 이후 매출액이 25% 증가했다. 영화관을 찾는 관람객도 전보다 24% 늘었다. 개인 여가생활뿐 아니라 문화활동이 높았다는 얘기다.

한 공연 기획 관계자는 “정부가 재정 투입에 대해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거나 문화 활동을 위한 지원책을 등한시할 경우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며 “법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 ‘저녁이 있는 삶’이 무늬가 아닌 현실적 행복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