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없는 규정 앞세워 즉시연금 1조원 환급 압박

금융감독원이 현재 규정에도 없는 보험금 일괄 지급을 명확한 행정지도도 없이 구두로만 강제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보험사가 지급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요청한 행정지도는 거부하고 법원 판결로 근거를 마련하려 소송을 검토하자 검사를 통해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민원 한 건이 불러온 파장=1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삼성생명 (86,500원 ▲1,100 +1.29%)은 오는 26일 이사회를 열어 금감원이 강제하고 있는 즉시연금 과소지급분 일괄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은 목돈을 한 번에 보험료로 내면 보험료 운용수익 일부를 매달 생활연금으로 지급하다 가입자가 사망하거나 만기가 돌아오면 보험료 원금은 돌려주는 상품이다. 보험사는 보험료 원금에서 사업비와 위험보장료를 떼기 때문에 가입자 사망이나 만기 도래시 보험료 원금을 돌려주기 위해 운용수익 일부는 책임준비금으로 적립해왔다.

보험료 원금에서 사업비와 위험보장료를 뗀 순보험료를 운용해 연금을 지급하다 금리가 떨어져 연금이 줄자 민원이 제기됐다. 연금액이 상품 가입시 설명 들은 최저보장이율에 못 미친다는 불만이었다. 이는 일부 상품안내서에 책임준비금을 제하지 않은 연금액이 기재된 탓이었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는 운용 수익에서 책임준비금을 떼내 연금액이 줄어든데 대해 연금 과소지급으로 판단했다. 약관에 '책임준비금은 산출방법서에 따라 계산된다'고 돼있을 뿐 연금액 산정 방법은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불완전판매 문제를 약관 문제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에 삼성생명이 민원이 제기된 1건의 조정을 받아들이자 금감원은 생명보험사 전체적으로 16만건이 넘는 유사 사례에 대해 책임준비금으로 뗐던 돈을 계산해 모두 연금으로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금감원의 결정에 따르면 지급액은 삼성생명만 해도 4000억원이 넘는다. 업계 전체로는 1조원에 육박한다.

◇도입도 안된 일괄구제제, 근거 없는 시범적용=금감원이 모두 지급할 것을 지시한 근거는 올해 하반기에 도입할 예정인 일괄구제제도 시범 적용이다. 일괄구제제는 금융사고나 민원이 발생하면 이를 금감원 홈페이지에 공시해 유사한 피해자의 분쟁조정 신청을 받아 금감원 분조위에 일괄 상정해 한 번에 구제하는 제도다. 이는 금감원의 분쟁조정세칙을 변경해야 도입할 수 있는데 세칙 개정 전에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현 규정에 따르면 구제 대상은 개별적으로 분쟁조정을 신청한 소비자로 한정된다. 외부 전문가가 포함된 생명보험협회 산하 분쟁예방위원회가 1년에 2차례 그간의 분조위 결정을 대상으로 유사 건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는 있지만 법리와 보험원리상 논란이 없는 건에 한해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즉시연금은 보험료 운용수익의 책임준비금 적립을 인정하지 않아 보험원리상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분조위 결정을 금감원이 시범 적용이라는 형식을 빌어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아직 일괄구제제가 도입되지 않아 말이 시범 적용이지 규정도 없이 그냥 연금을 더 주라는 것"이라며 "지금 없는 규정을 근거로 이사회가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이 보험업계 전체에 안내 공문을 보내긴 했으나 분조위 결정을 참고하라는 내용일 뿐 비슷한 유형의 즉시연금 가입자 모두에게 일괄 적용하라는 점은 명시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명확한 행정지도 공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 보험사가 이사회를 통해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려면 감독규정이나 금융당국의 행정지도, 법원의 판결 등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공문에 일괄구제하라는 언급은 없지만 분조위 결정과 삼성생명의 수용 결정을 첨부해 안내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행정지도는 필요없다"고 말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일괄구제를 강제할 근거가 없어 훗날 법적 책임이 불거질 수 있다"며 "금감원도 이 때문에 과소지급 연금을 지급하라고 명시한 공문은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수용 안하면 검사 후 중징계, 퇴로 없는 금감원 '칼날'= 금감원은 삼성생명이 분조위가 제시한 조정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같은 약관을 사용한 즉시연금에 대해선 모두 과소지급분을 주는 것이 당연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당시 분조위 결정을 수용한 것은 경영상의 판단이었을 뿐 법적으로 잘못을 인정해서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당시 금감원은 삼성생명이 분조위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별도의 검사를 실시해 기초서류(약관) 위반으로 제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삼성생명은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의 보험료를 감안할 때 최대 수조원에 이르는 과징금 부과 등 중징계를 받을 수 있어 분조위 결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금감원의 검사 압박 등을 고려한 경영적인 판단을 통해 분조위 결정이 내려진 1건에 대해서만 지급을 결정한 것"이라며 "모든 계약에 지급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지급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생명 고위 관계자도 "소송에 따른 결과든 금감원의 공식적인 행정지도든 지급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며 "소송을 통해 법원에서 지급 결정이 나면 소멸시효와 무관하게 모든 가입자에게 과소지급분을 돌려줄테니 행정지도가 어렵다면 소송이라도 가능하게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