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신고 후 무고로 역고소…증거기록 못준다는 검찰?

현정씨(가명)는 직장내 성추행을 신고했다가 무고로 역고소를 당했다. 성추행 사실을 회사에 알리자, A씨에게 성추행을 당한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났다. 현정씨와 또 다른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A씨는 술자리에서 강제로 입을 맞추는 등의 성추행 행위를 인정하며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또 다른 피해자 사건에서 법원은 A씨의 부적절한 행위를 인정했다. 하지만 현정씨 사건은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A씨는 11개월 뒤 태도를 바꿔 현정씨를 무고로 고소했다.
A씨는 성추행 사건 조사를 받을 때에는 '추행 행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본인이 무고로 현정씨를 고소한 이후에는 '서로 애뜻한 감정에서 한 행위'라며 말을 바꿨다. 성추행 사건 때와는 달리, 실제 현정씨가 주장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현정씨는 "한두번 얼굴을 봤을 뿐인 유부남 A씨와 애뜻할 일도 없고, A씨가 성추행 사건 때와 말을 바꿨다"며 A씨의 사과가 담긴 녹취록까지 제출했지만, 1·2심 법원은 현정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현정씨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관련기사: "뽀뽀해서 죄송하다"던 가해자, 말 바꿔 '무고'로 맞고소)


현정씨에게 유죄가 선고되자 A씨는 현정씨에게 1억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민사 소송 과정에서 현정씨는 검찰이 성추행 사건 당시 A씨가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이 담긴 피의자신문조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의 신문조서를 확인한 현정씨의 변호인은 "이 조서에는 무고 재판 때와 다른 말을 하는 A씨의 진술이 담겨있다"고 전했다.

'성추행 피해자'에서 '무고 가해자'로 입장이 바뀐 현정씨는 A씨의 말바꿈을 자신의 무고 사건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검찰에 "성추행 사건 수사 당시 A씨의 진술 기록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검찰보존사무규칙'을 이유로 들었다. 규칙 제20조의2는 불기소 사건 등 검사의 처분으로 마무리 된 사건 기록 중 '본인'의 진술이 기재된 서류(녹음물·영상녹화물 등)와 '본인'이 제출한 서류 등은 열람·등사(복사)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청 가능한 자료를 '본인'의 기록으로 한정해두고 있기 때문에 현정씨가 A씨의 진술 기록을 요청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검찰 관계자는 "규칙에 따르면 본인의 기록만 요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 상대방의 진술 기록을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면서도 "통상적으로 성폭력 사건에서 비롯된 무고 사건의 경우 성폭력 사건 기록이 함께 들어가는데 이례적이긴 하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규정을 근거로 들었지만, 사실 증거 제출 여부는 검사의 재량에 따른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자료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검찰 관계자 역시 "(규정이 있지만 검사의) 재량에 따라 재판에 필요하다면 법원에 제출할 수는 있다"며 "다만 검사 입장에서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의자신문조서에는 민감한 내용이 많아 진술 당사자, 즉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 수사를 받은 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제공이 부담스럽기는 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검사의 재량에 따라 피고인은 무죄 입증을 위한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경찰 조사 과정 중 진술한 기록조차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면 피고인의 방어권이 과도하게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때문에 자료 제공에 대해 검찰의 재량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재판에 필요한 기록은 절차를 통해 제공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정씨의 변호인인 이은의 변호사는 "애초에 무고 사건은 성폭력 고소에서 시작되는데, 성폭력 피해 신고자가 무고로 몰린 경우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성폭력 수사 기록을 검찰의 편의에 따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며 "재판부가 요청을 해도 검찰이 거절하면 당사자 입장에서 받아볼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무고 사건이 재판에 넘어가면 검사는 무고 혐의를 입증해 유죄를 받아야 하는데, 검사가 스스로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겠느냐"며 "결국 어떤 검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데, 검사는 고소인의 대리인이 아닌 공익의 대표자로서 유죄 판결이라는 성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정말 죄가 있는지 중립적으로 판단하고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꼬집었다.

현정씨만의 일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 본인이 낸 자료조차 검사의 재량에 달린 판단에 따라 받아보지 못하는 일도 있다.

미정씨(가명)은 대학원 지도교수의 친한 친구인 B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사건은 재판에 넘겨졌다. 미정씨는 성폭행을 저항하는 과정에서 온몸에 생긴 멍자국 등이 담긴 상해진단서를 증거로 제출했지만, 법원은 피해자의 저항이 소극적이어서 B씨가 미정씨의 거부 의사를 몰랐을 수 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미정씨는 민사 재판을 통해서라도 피해를 구제받고 싶었다. 이를 위해 검찰에 본인의 상해진단서 등 수사 과정에서 냈던 자료들을 복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검찰은 자료 제공을 거절했다.

형사소송법 제59조의2는 재판이 확정된 기록의 경우 소송관계인 등이 열람 등사에 관해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면 열람·등사(복사) 할 수 있다고 정해두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재판이 끝난 경우 기록 원본을 줄 수는 없지만, 본인이 제출한 자료를 복사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며 "열람·등사 신청을 통해 받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담당 검사가 허가하지 않으면 기록을 받을 방법은 없다. 결국 어떤 검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증거를 확보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변호사는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 회복을 위해 그나마 행사할 수 있는 열람·복사청구권이, 검사의 권한에 따라 방해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심지어 무고로 역고소 당한 경우 피고인의 방어권까지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