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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155> 최영규 시인 '크레바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8.09.0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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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산에 오르는 시인이 있다. 단순히 등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과 남미, 오세아니아 최고봉을 오르고,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초오유봉(8201m)을 원정대장으로 등반한 그의 이력은 시인이라기보다 전문 산악인에 가깝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영규(1957~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크레바스'에는 전문 산악인의 거친 숨소리가 난무한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생사(生死)를 넘나든다.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죽음이다. 그는 왜 시를 쓰면서 산에 오를까?

저렇게 격노하는 山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눈보라를 견뎌내야 한다. 쭈그리고 버틴 지 이틀째 새벽. 山 아래로부터 붉고 푸른색의 햇살을 쏘아 올리며 아침이 올라왔다. 구부린 허리 너머로 파란 하늘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장비를 챙기고, 고소증세로 메슥거리는 뱃속으로 알파미를 밀어 넣었다. 허벅지를 오르내리는 신설(新雪) 속에 크레바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 모른다. 눈 속의 허공과 눈 위의 허공을 건너야 한다. 발끝의 풍향계가 눈을 뜨는 그때 건너편 급사면으로 엄청난 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눈, 눈, 눈의 사태. 그렇게 山은 의욕(意慾)과 만용(蠻勇)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발걸음을 꾸짖고 있었다.
- '눈사태' 전문


여는 시 '눈사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레닌봉(7134m) 등반에서 겪은 것을 시로 썼다. 베이스캠프를 출발, '캠프 2'에서 지독한 눈보라를 만나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텐트 안에서 꼬박 이틀을 "쭈그리고 버"텨야 하는 상황. 시인은 "격노하는 山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눈보라를 견"딘다. "이틀째 새벽"이 되자 눈보라가 그치고 "山 아래로부터 붉고 푸른색의 햇살을 쏘아 올리며 아침이 올라"온다. 하지만 날씨는 온전한데, 몸은 정상이 아니다. "구부린 허리"도 불편하고, "고소증세로 메슥거리"기까지 한다. 그래도 정상에 올라야 하므로, 그것이 목적이므로 시인은 고도가 높은 곳에서 이용하는 건조시켜 경량화한 즉석식품 '알파미'를 먹는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발을 내딛는 순간 "건너편 급사면으로 엄청난 눈덩이가 쏟아져 내"린다. 그때 시인은 깨닫는다, 내가 "의욕(意慾)과 만용(蠻勇)으로 가득 차 있"구나!

칼질을 당한 커다란 흉터였다
아니 긴 시간 날을 세운 깊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목을 뻗어 내려다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바닥 그 어두운 곳으로부터
빙하의 서늘한 입김 훅 올라왔다
색깔을 분간할 수 없는
기억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던 그런 어둠이었다
순간 주춤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두려움이 힘을 썼다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속박(束縛)의 공간

입구에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섬광처럼 잠깐씩 반짝거리곤
깊은 얼음벽을 따라
나의 시선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함정
- '크레바스' 전문


크레바스는 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이다. 그 위에 눈이 쌓이면, "칼질을 당한 커다란 흉터"를 알아채지 못하고 발을 내딛는 순간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처참한 사고"('높이의 힘')를 당할 수 있는 것. 산사태도 그렇지만, "지도에도 없는/ 크레바스는// 살아서는 결코 건널 수 없는"('살아서는 건널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다행히 크레바스를 발견한 시인은 "목을 뻗어 내려다"본다. "보이지 않는 바닥"에서 시인은 "색깔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 어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 그때로 돌아가"('해빙')거나 "점령군처럼 처마 밑으로/ 저벅저벅 들이닥"(봄날 오후)친 공포를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인지하는 것이 바로 눈(目)이다. "누구나 죽어서야 다시 살아나는"(이하 '살아서는 건널 수 없는') 크레바스를 발견한 시인은 "누가, 검은 눈동자를 건너는 것일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상에 풍경 따윈 없었다. 적막을 뒤집어쓴 허공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얼음의 숨결이 내 숨결을 막았다. 찰나의 환호성마저 바람이 잘라먹었다. 하지만 神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전문


고산증·산사태·크레바스·혹한 등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시인은 드디어 정상에 섰다. "눈 속의 허공과 눈 위의 허공을 건너" 정상에 올랐는데, 목적을 이루었는데 허무하게도 정상에는 '풍경'도 없는, "환호성"도 없는 "적막을 뒤집어쓴 허공만이 나를 반길 뿐"이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건너온 셈이다. "神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지만 시인이 고봉을, 정상을 오르는 이유가 단지 신을 만나기 위함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산에 오를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려보면 "시가 거기 있으니까"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생과 사가 찰나에 갈리는 설산 고봉(정상)을 오르는 동안, 나를 극한 상황으로 내모는 "치명(治命)과도 같"('노란부리까마귀')은 과정에서 시는 태어날 것이다.

가마 속도 아직은 마음이 덜 풀린 석양빛이다

나도 이젠
가슴을 조여 오던
설렘도 그리움도 다 삭은 듯하다

아마도 저 어두운 숲속
풀벌레 소리와 달빛마저 다가져다
태워야
오늘밤 그리움이라는 그릇이
잘 구워질 것 같다

그래, 보고 싶은 마음
한 번 더 쪼개어
관솔로 넣고 기다려보자
- '가마 속 풀벌레 소리 -옹기가마 앞에서' 전문


산을 내려온 시인이 옹기가마 앞에 앉아 있다. 산 정상을 밟았지만 "아직은 마음이 덜 풀"린 시인에게 "미리 온 봄볕"(이하 '첫,')은 "시퍼런 칼날의 끝" 같다. 하지만 "그곳과 나 사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간극(間隙)"('시인의 말')이 존재함을 깨달은 시인은 나를 돌아본다. 어느새 환갑의 나이가 지났다. "가슴을 조여 오던/ 설렘도 그리움도 다 삭"힐 나이다. "조각난 얼음 속으로 파묻히고 밟히면서"('설산 아래에 서서') 찾은, "풀벌레 소리와 달빛마저 다가져다" 태우면서 찾는 이는 누구인가. "당신은 나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카주호 역에서 눈동자 없는 사내를 만났다')를 감안하면, '그 누구'는 신이나 산, 사랑하는 사람 등으로 특정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이자 허기일 것만 같다.

◇크레바스=최영규 지음. 시인동네. 120쪽/9000원.

[시인의 집]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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