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안진의 고향 안동이야기 '조상들은 자부심으로 살아오셨죠'

20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강연하는 류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사진=배성민 기자

“양반의 고장, 안동이요. 거기 뭐 먹을 것이 있습니까? 전기도 다른 곳 다 들어오고 나서 1975년인가에 겨우 들어왔죠. 그래도 거기 사시는 분들은 오기라고도 하고 자만심이라고도 비치지만 자부심으로 살아오셨어요.”

류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이 명절을 앞두고 자신의 고향 경상북도 안동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이어갔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 박물관 교육관 어울림방에서 열린 고향, 전통, 사랑을 주제로 한 특강자리에서다.

전주류씨 문중과 함께 연 행사여서 그런지 100여명의 청중 가운데는 머리 희끗희끗한 노신사와 중장년의 여성 관객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널리 알려진 류안진 시인은 시, 소설, 수필 등 장르를 넘나드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 치밀한 구성 방식으로 평단의 호평을 얻어온 그의 작품세계는 경북 안동 무실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경학과 예학을 숭상했던 조상들에 대해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이 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때로는 안동(특히 무실 마을)의 어르신들에 대한 여러 일화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상물정(특히 서울(한양) 소식) 모르고 예학과 보학에 천착한 할아버지, 아버지들은 안사람이 어떻게 제사상을 차리는 지도 몰랐다고 술회했다. 어려운 살림에 빚을 낸 제수음식들인줄 몰랐다는 것.

하지만 그같은 조상에 대한 예의로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 등의 광풍에서 당시 안동의 5개 성씨가 문중어른들의 함자에 호를 넣어부르는 편법 아닌 항거를 택했다는 사연도 소개했다.

안동 처자들을 원하고 그 기풍을 떠받드는 주변 어른들의 일화 몇 토막도 소개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서둘러 치른 결혼식 당일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신혼여행에서 짐을 풀기도 전에 올라와 장례를 치른 며느리의 이야기, 장터에서 안동의 토산품을 사면서 너무 싸다고 느껴 거스름돈을 안 받는 손님에게 일부러 쫓아와 돈을 돌려주려 했던 고집센 상인 이야기, 감기(고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꽂꽂했던 안동 양반들의 상투를 고아먹으면 낫는다고 농을 건넸던 노교수 이야기, 서울 누하동 출신으로 정승, 판서와 정경부인을 여럿 낸 남편의 가문에서는 안동 양반들을 토반으로 불렀다는 농담 등등.

류안진 시인은 실제로 ‘안동’이라는 시도 남겼다. 그중 한 대목이다.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중략)/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차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대구 받는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류안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