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무너진 골목, 청년이 세우다…회기시장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25길. 초등학교 앞 좁은 골목을 따라 뻗어있는 회기시장이다. 1970년대 형성된 이곳은 동네의 '주방'이었다. 근처 도축장의 고기와 청량리청과물도매시장, 경동시장에서 먹거리가 공수됐다. 정육점, 생선가게, 방앗간에서 식재료 냄새가 풍겼다. 주변이 재개발되며 밀려난 상인들까지 합세했다. 100미터 남짓하는 작은 시장에 정육점만 5곳에 달했다.


가까운 회기역 앞으로 마을버스 노선이 생기면서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주택이 하나씩 원룸으로 바뀌며 시장을 찾던 주부들도 자취를 감췄다. 2010년대 초 생긴 대형마트는 치명타였다. 50여개가 넘던 상점은 10개 남짓으로 줄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기자가 찾은 회기시장은 쇠락한 시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년들이 나타난 덕분이다. 방앗간과 떡집 사이 빠진 이처럼 비어있던 점포는 카페와 선술집이 채웠다. 날렵한 픽시 자전거를 탄 청년과 짐을 가득 실은 투박한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노인이 마주치며 비켜갔다. 자리를 기다리며 가게 앞에선 대학생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몇 년 새 회기시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회기시장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 건 젊은 사장들이 등장하면서다. 2012년부터 JB파스타를 운영해 온 전종배씨(33)는 갑작스레 건물주가 바뀌어 쫓기듯 새 가게를 찾다 2015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전씨는 "처음 개업할 땐 돈도 없는 처지였고, 당장 임대료나 권리금이 적은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며 "당시엔 해가 지면 사람도 잘 다니지 않던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전씨와 비슷한 처지의 청년 사장이 회기시장에 나타났다. 파스타 가게가 자리를 잡으면서 근처에 고기집, 쌀국수, 선술집이 들어섰다. 2015년 이후 새로 생긴 식당만 10여개에 이른다. 20~30대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젊은 가게가 들어서면서 시장 골목을 찾는 이들의 모습도 달라졌다. 젊은이들이 찾기 시작한 것. 인근의 홍릉수목원과 경희대학교 캠퍼스가 빼어난 경관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회기시장까지 오는 외지인도 늘었다. 서울시와 구청의 전통시장 활성화 노력에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골목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학생 이다운씨(24)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갈 일이 없는 곳이었다"면서 "요즘은 확 젊어졌다. 빵집이나 도예공방까지 생기면서 '한 번 가봐야지'하는 곳이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도 등장했다. 경희대 학생 4명이 채식주의 빵집, 한식당, 양조장, 도예공방을 함께 운영하는 가게가 시장에 문을 열었다. 빵집을 운영하는 김아윤씨(23)는 "슬로푸드나 양조, 도예 등에 관심 있는 친구와 모여 가게를 열었다"면서 "SNS에서 관심이 높아지면서 주말에도 붐빈다"고 전했다.



골목에는 활기가 돌지만 숙제는 남아 있다. 시장이 먹자골목이 되면서 기존 시장 상인들은 소외되고 있기 때문. 상권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2015년 이후에도 시장을 지키던 철물점, 지물포, 떡집 등이 문을 닫았다. 시장에서 20여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은 "오가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정작 오래 장사한 가게들은 매출에 거의 도움이 안된다"면서 "젊은 친구들이야 마케팅도 잘하지만 나 같은 상인들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대료 상승으로 부담도 커지고 있다. 2015년 경희알찬김밥을 연 이현정씨(55)는 "학생들에게 저렴하고 좋은 음식을 팔고 싶어 가게를 열었다"면서 "1500원에 김밥을 팔아 왔지만,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하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 A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최근 새로 계약한 상가는 50만원 정도 하던 임대료를 150만원으로 3배나 올렸다"면서 "기존 건물주가 건물을 팔거나 리모델링 하면서 2~3배 뛰는 건 다반사"라고 전했다.

상인들은 모처럼 활기가 돌기 시작한 상권에 대한 애착과 우려를 드러냈다. 전종배씨는 "재건축으로 밀려나서 온 곳에서 상인들이 함께 고생하면서 상권을 키워왔다"면서 "결국 임대료가 오르면 기존 상인들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상인, 건물주가 서로 배려하면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남궁민 기자의 '추신'
안녕하세요 남궁민 기자입니다. 연남동, 가로수길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작은 골목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혹시 유명한 곳에만 눈길을 뺏겨 바로 옆에 있는 공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평생 골목을 지켜 온 장인과 상인, 주민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쇳소리가 들리는 철공소 골목부터 가죽 냄새가 가득한 곳까지.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골목을 댓글이나 메일로 남겨주세요. 경청하고 좋은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