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앞에 냉정한 美? '카슈끄지 사태'에도 사우디 중시 여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전용기에 오르기 전 기자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의혹과 관련, '카슈끄지가 죽었느냐'는 질문에 "분명히 그런 것 같이 보인다.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해 카슈끄지의 사망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인정했다 © AFP=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자국 영사관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하면서 국제사회의 분노가 높아지는 가운데 유독 미국만 사우디를 감싸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란이라는 공통의 적을 둔 미국과 사우디의 특수 관계는 물론 양국 사이의 깊은 경제 관계가 배경으로 보인다.


◇빈 살만 감싸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의 인터뷰에서 사우디 왕실이 카슈끄지 사망과 관련이 없다는 기존 주장을 물리면서도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 왕세자에 대해 "강한 사람이자, 진정한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카슈끄지 살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빈 살만 왕세자를 신뢰한다는 뜻을 재차 강조한 셈이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이 20분 남짓 진행된 인터뷰 내내 미국과 사우디의 경제적 관계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빈 살만 왕세자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사우디가 미국 중동 정책의 핵심"이라고 했다. 사우디를 어떤 방식으로 제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아직 답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면서 답변을 피했다.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집필활동을 해왔던 카슈끄지는 지난 2일 결혼을 위한 서류를 받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뒤 실종됐다. 사우디 당국은 사건 발생 후 18일이 지나서야 카슈끄지가 영사관에서 다른 자국민들과 싸움이 붙어 우발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망 경위나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살해범들이 빈 살만 왕세자의 경호원 등 측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왕세자가 직접 지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도 빈 살만 왕세자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빈 살만 왕세자가 지난해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왕족들을 대거 체포한 사건의 배후에도 쿠슈너와 트럼프 행정부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피의 숙청'으로 불리던 당시 사건 약 한 달 전 쿠슈너 고문이 예고 없이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과 만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재러드는 빈 살만은 동갑이고 서로 좋아할 뿐"이라며 물밑 거래설을 부인했다.

◇인권보다 '돈' 중시하는 월가

카슈끄지 사태가 벌어지면서 미국 금융 중심지 월가의 주요 경영자들은 오는 23~25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열리는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FII') 행사에 참여하려던 계획을 줄줄이 취소했다. FII가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사우디의 경제 개혁을 홍보하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이 사우디행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 토마스 배럭 주니어 콜리티캐피탈, 도이치은행 최고경영자 크리스티안 제빙 등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많은 금융기업이 최고경영자 대신 고위급 인사를 FII에 파견한다. 세간의 이목 때문에 일인자가 직접 사우디에 가지는 못하지만, 사우디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앞서 중동 순방 중인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도 FII 참석은 취소했지만, 사우디 방문은 그대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는 카슈끄지 사망에도 이란 견제와 테러 자금 감시를 위해 "미국과 사우디 사이의 경제적 결속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월가가 사우디를 중시하는 이유는 세계 최대의 '큰손'이기 때문이다. 원유를 팔아 막대한 자금을 모은 사우디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 공공투자펀드(PIF)를 운용 중이다. 자산 규모가 3000억달러 PIF는 세계 곳곳에 투자하면서 매년 막대한 수수료를 월가 투자은행에 지급하고 있다. 무시할 수 없는 고객인 것이다. 코너스톤캐피탈의 존 윌슨 연구 및 기업구조 부문 대표는 "가치 관점에서 강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인권 문제와는 별개로 복잡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심보"라고 했다.

월가가 중동 독재국가에 투자하는 것은 이미 비밀도 아니다. 골드만삭스는 유명한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집권 시절 투자 유치를 위해 리비아 국부펀드 관계자에 호화 여행을 보내주고, 매춘부까지 동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카슈끄지 사망 사태로 윤리와 돈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월가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