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판사가 '판사회의' 의장 됐다고 '물의 판사'로 지목"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정황을 검찰이 포착했다. 사법농단 사태를 촉발시킨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통상 최연장자가 선출되는 관행이 있던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 젊은 판사가 출마해 당선됐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판사를 '물의 판사'로 지목한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머니투데이 '더엘'(theL) 취재 결과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2015년 1월22일 작성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서' 제하의 문건에는 성추문 등으로 등 징계성 인사가 필요한 법관들의 명단이 담겼다. 이들은 선발성 인사에서 전부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당시 사법부 수뇌부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법관까지 모두 '물의 법관'에 포함됐다는 점이다. 지난 2014년 기존 관행을 깨고 상대적으로 젊은 김모 판사가 단독판사회의 의장에 출마해 투표에 의해 최초로 의장으로 선출되자 법원행정처는 김 판사를 '물의 판사'로 지목했다. 서울중앙지법의 내규는 직급별 판사회의 의장을 의결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그동안 관례적으로 최선임자가 의장이 선출돼왔는데, 김 판사가 그 '관례'를 깼다는 게 '물의 판사'로 분류된 이유였다.

이후 김 판사가 법원장 등 기존 사법행정라인의 사법행정에 반대하면서 '사무분담 기준을 법관 개인의 희망을 1순위로 하고, 사무분담 확정 전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것'을 주된 내용으로 서울중앙지법 사무분담에 관한 지침 개정을 시도하려 하자 법원행정처는 김 판사를 '물의 판사'라고 확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행정처는 김 판사가 소속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이와 같은 사무분담 지침 개정을 시도하고 있고, 이 연구회가 종전 진보 법관 중심의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소속 법관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것이라고 판단해 이 연구회 소속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또 이 연구회 소속 법관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판사회의 의장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보고 2016년 3월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에 개입을 시도했다.

권순일 대법관(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취임 직후 법원 내부망에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에 관한 소신을 올린 송모 판사 역시 문건에서 부적절한 게시 글을 올린 '물의 판사'로 지목됐다. 법원행정처는 문건에서 송 판사에 대해 '형평 순위 강등하여 지방법원 전보'하는 인사조치하는 내용을 검토했다. 인사평가 누적점수로 등급을 매기는 형평 순위에서 최고 등급이었던 송 판사는 이듬해 2월 정기 인사에서 지망과 전혀 무관한 지방 지원으로 전보 발령됐다.


앞서 대법원은 세 차례 자체 조사에서 블랙리스트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판사들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을 가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문건이 나오면서 '제식구 감싸기'식 조사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안철상 현 법원행정처장을 단장으로 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특조단)은 지난 5월 3차 조사 결과 발표에서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을 사찰한 정황은 드러났지만, 인사상 불이익을 가했다는 블랙리스트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편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서' 문건에는 대법원의 최종 결재권자인 양 전 대법원장과 당시 법원행정처장이었던 박병대 전 대법관의 서명이 담겨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6월 기자회견에서 "어떤 법관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