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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집]어째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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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집]어째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런 일이

머니투데이
  • 김정수 시인
  • 2018.12.2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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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조현석 시인 '검은 눈 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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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현석(1963~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는 "세상에서 받은 여러 상처"('시인의 말')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시인의 상처는 "꺾이고 휘어지더라도 무릎을 꿇지"(이하 '오십견') 않는, "부러져도 괜찮으니 창피하다 절대 고개는 숙이지" 않는, "직진밖에 모르는 성격"('쉰') 탓이다.

강직한 성품인지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중심보다는 모서리의 삶에 더 눈길을 준다.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시인의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만 남아 있다. 이번 시집에 세상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가 많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검은 글만 가득한 세상이다 하루 종일 표지부터 더듬더듬 점자책 읽듯 끝장까지 훑은 뒤 뒤표지를 보면 어느새 검붉은 노을이다 순간 발화점에 다다른 세상을 한 곳에 가두는 자물쇠이다

사막의 노란 불안, 남극의 희디흰 고독, 아마존의 푸른 휴식까지 몸을 거쳐갔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무지개 떴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고통 한데 뒤 섞인다 검은 기름 부은 듯 짧은 순간 타고 남는 것은 잿빛 침묵의 밤이다

언제부터인지 대화는 없다 소통하지 않고 지시만 있을 뿐이고 복종은 선택이다 활자로 박힌 희로애락이 꿈틀거린다 마구 끓어대는 용암이었고 끓는 속을 소화할 길 없어 다시 종이 위에 뱉어내고 만다

오물 가득한 세상, 아직 평온하게 보여지고 책은 덮인 그대로이다
- '불타는 책' 전문


시인은 오랫동안 출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시인이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고 "바탕화면의 작은 모래시계만 응시"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밤새 전송된 책 주문 팩스"(이하 '노동절 백반 한 상')를 확인하고 커피 한 잔 마신 후 "안부 전화 1통, 책 주문 전화 2통"을 받는다. "하루 종일 표지부터 더듬더듬 점자책 읽듯 끝장까지 훑은 뒤 뒤표지를 보면 어느새 검붉은 노을"이 창가에 찾아든다.

혼자 사는 시인에게 낮과 밤이 바뀌는 퇴근 무렵은 "지독하게 아득하"면서 고독한 경계의 시간이다. 낮에는 찾아오는 이라도 있지만 밤에는 철저히 홀로 불안과 고독을 견뎌야 한다. 시인에게 밤은 "발화점에 다다른 세상을 한 곳에 가두는 자물쇠"와도 같다. "잿빛 침묵의 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된다는 것이다.

"어째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이하 '노동절 백반 한 상'),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리고 내년에도 "뼈 빠지게 일해야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인을 절망케 한다. 1인 출판을 하기 전에 시인은 "일요일에도 출근해 머리 박고 일했고/ 주말에도 퇴근하지 않았던 오피스 코콘족"('그 의자는 죄가 없다')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훨씬 나은 노동환경이지만 "언제 멈출지 모를 셀 수 없는 불안"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고왔던 청춘"과 스멀스멀 찾아드는 고독은 시인을 침묵의 늪에 빠져들게 한다.

늦은 겨울 아침과 점심 사이
백반집 한 켠에 앉아
조금 식은 밥을
더 식은 국에 말아 먹을 때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비, 비, 비, …… 빗방울
늙고 성질 급한 나무들은
벌써 알몸 되어 모조리 맞는다

메인 목으로 미끄럼 태우듯 밥알 넘기고
반찬 몇 점 욱여넣은 뒤
젓가락 숟가락 밥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신발 뒤꿈치 구겨 신고 담배 한 대 물고
백반집 문 밀고 어슬렁거리며 나서는데
이런 벌써 허기가, 또 배가 고파온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살이
만만하게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워도
정말 모른다, 기억하려 해도 자꾸 잊는다

지하 사글세방으로 돌아가는 길
든든해지지 않는 그 밥 한 공기의 우울이
순식간에 내린 빗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조금씩 보기 좋은 솜털 같은 눈송이로 변해
얼어붙은 세상을 포근하게 뒤덮어
가끔은 희망이 될 때까지……
- '밥 한 공기의 희망' 전문


혼자 살기에 시인은 자주 혼자 밥을 먹는다. 아침 식사는 몸에 좋다는 것을 "멀티 블렌더 유리병에 가득 채워 갈아 마"('일용할 양식')시고,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늦은 점심을"('갯벌의 첫 새벽') 때운다. 시인은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함바집"('뒷모습')에서, "작은 상가 시장/ 그 안 호남식당 플라스틱 탁자"('노동절 백반 한 상')에서, "늦은 겨울 아침과 점심 사이/ 백반집 한 켠에 앉아/ 조금 식은 밥을/ 더 식은 국에 말아 먹"는다. "희망과 설렘을 결코 탐하지 않았"('울게 하소서')다지만 백반집 문을 나서자마자 "벌써 허기가 진다"는 것은 따뜻한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허기다. 돌아가셔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엄마가 차려준 집밥 같은 그런 것.

해거름 지나 폐허처럼 적막해진 마을회관 건너편 세탁소 간판의 검붉은 녹껍데기 우툴두툴 일어난 고뇌들 군데군데 실핏줄 툭툭 끊긴 빨랫줄 묵은 시간에 짓눌린 주인 없는 외투 한 벌 덩그라니

갈라지고 바스러진 솔기 끝으로
수없이 뜨고 진 차가운 별, 달빛
바람 없이도 마구 뒤틀린 한 생의 순간
몸 사라진 이후 남은 고독은 독약보다 더 독해
쓰디쓴 독함 삭이느라 한 계절이 다 가고
또 다른 계절도 지나고
기억 희미할 시간마저 더 지나고
떨어져 뒹구는 여러 개의 금빛 단추
부서지거나 전혀 삭지 않는 사리들
허참, 아직은 푸르고 싱싱해

거침없던 바람 흔들거리던 고요마저 무시한 허공의 몸 따스했던 시절 옷섶의 추억도 닳고 닳아 맨들맨들 세상의 기억 모두 감추어버린 처마 밑 침묵의 풍경(風磬) 흔들흔들 오래 멈췄다가 다시 흔들
- '울컥' 전문


시 '울컥'은 시인의 현재 심경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번 시집의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해거름 지나" 인적 없는 마을에 도착한 시인은 "마을회관 건너편 세탁소"에 시선이 머문다. "간판의 검붉은 녹껍데기 우툴두툴 일어"났고, "군데군데 실핏줄 툭툭 끊긴 빨랫줄"에 걸린 "주인 없는 외투 한 벌"을 바라보던 시인은 문득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해거름이 지났다는 것은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 "폐허처럼 적막해"졌다는 것은 현재 시인의 마음상태와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상황을 의미한다. 고뇌에 찬 시인은 빨랫줄에 오래 걸려 있는 외투 한 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1연 마지막의 "덩그라니"는 현재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절대고독의 상태임을 암시한다.

"묵은 시간에 짓눌린" 것은 빨래이기도 하지만 시인 자신이다. "아직은 푸르고 싱싱해"라고 부정하지만 "갈라지고 바스러진 솔기", "닳고 닳아 맨들맨들"해진 옷섶은 감출 수가 없다. "쓰디쓴 독함 삭이느라 한 계절이 다" 보낸 시인은 "마구 뒤틀린 한 생의 순간"과 "독약보다 더 독"한 고독의 기억을 지우고 있다. 그때 시인의 눈에 "떨어져 뒹구는 여러 개의 금빛 단추"가 들어온다.

그 순간 시인은 금빛 단추에서 "부서지거나 전혀 삭지 않는 사리들"을 떠올린다. 사리는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시인은 한 계절-또 다른 계절-기억 희미할 시간을 거치면서 더 이상 "부서지거나 전혀 삭지 않는" 절대고독의 사리를 만들었다. 사실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견딘 침묵의 결과물이다. 올곧게 세상을 사는 동안 시인은 통증을 안으로 삭이면서 "흔들흔들 오래 멈추었다가 다시 흔들"리면서, 침묵하면서 고독한 세월을 묵묵히 견디고 있다.

◇검은 눈 자작나무=조현석 지음. 문학수첩 펴냄. 136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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