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한진 스튜어드십코드 '눈높이'는 높아지는데…

국민연금의 첫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 행사가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고 있다.

대상기업인 한진그룹에 대해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권을 제대로 행사한다"는 원칙은 정했다. 그러나 범위와 방식, 수위 등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는 제대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벌써 실망감이 흘러나온다.


23일 증시에서 한진 (21,050원 ▼100 -0.47%)과 한진칼 (57,400원 ▼1,000 -1.71%)의 주가는 각각 전날보다 6.95%, 1.5% 하락한 4만5550원과 2만9600원에 마감했다. 대한항공 주가는 1.25% 올랐다.

오전에 열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하 수탁위)에서 한진그룹과 관련한 지배구조 개선, 주주 가치증대 방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 투자자들이 결과를 보고 실망 매물을 쏟아낸 것이다.

수탁위에서는 이날 대한항공과 한진칼 등 한진그룹 주요 계열사에 대한 주주권 행사방침을 정할 예정이었다. 오전 8시부터 5시간 동안 진행된 마라톤 회의는 그러나 소소한 내용만 확정한 채 마무리됐고, 정작 중요한 안건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에 돌려보내기로 했다.


수탁위 회의에서 정해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이사선임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7대2로 확정됐다. 조 회장은 올해 3월17일로 대한항공에서 이사 임기가 끝나고 한진칼은 내년 3월까지 임기가 보장돼 있다.

조 회장에 대한 수탁위 결론을 풀어보면 '대한항공-연임반대, 한진칼-보류'인데 사실상 조 회장의 경영권 유지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한항공의 경우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져도 의결권이 부족해 조 회장 연임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물산 등의 사례를 볼 때 중요한 이슈가 있는 주총의 경우 전체 주주 가운데 70~80%가 참석한다. 참석주주의 절반 이상의 표를 얻는 쪽이 이기니 최소 35%는 확보해야 승산이 있다.

그런데 대한항공은 조 회장 일가가 33.35%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국민연금은 12.45%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성과를 얻으려면 외국인이나 소액주주들의 표까지 얻어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진칼은 사정이 다르다. 조 회장 일가가 28.93%를 보유하고 있고 국민연금과 KCGI가 총 18.05%를 보유하고 있다. 반대 주주들의 세를 규합하면 주총 특별결의(출석주주 2/3와 발행주식 1/3 찬성)도 가능하다.

그러나 수탁위에서는 한진칼 등 특별결의를 표결해 기존 경영진을 해임하자는 것에는 반대의견이 우세했다.

한 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해도 조 회장이 타격을 입지 않는 대한항공은 하자는 것이고, 가능성이 있는 한진칼은 하지 말자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첫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라 부담이 크지만 어려운 이슈에서도 국민연금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시장의 목소리였다"며 "오늘 수탁위 결과는 싸움 시작전에 발을 빼는 모습이 연출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수탁위 회의에서도 조 회장의 해임을 비롯해 사외이사 신규선임, 정관 변경 요구 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됐고 이와 관련한 격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다수 위원들이 이에 반대한 결과 주주권은 행사하되 경영에 부담을 주는 수위는 안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3년째 국민연금 수탁위에서 한진그룹 경영문제가 지적됐지만 변화가 없었다"며 "올해는 주주행동주의 바람이 불며 사정이 다를 줄 알았으나 앉아서 표결하는 국민연금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수탁위 직후 보건복지부에서 작성한 보도자료가 재작성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일부 위원들이 "회의에서 나눈 의견과 다른 방향으로 자료를 만들었다"며 항의해 회의 녹취록까지 검토하는 일이 있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