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제패한 AI, 토론에선 인간에 지다

/사진=IBM 홈페이지.

"부유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건 인류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지난 11일. 한 여성의 목소리가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강연장에 울려퍼졌다. '유치원에 국가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게 맞느냐?'라는 주제를 놓고 벌어진 열띤 토론 대결서 나온 발언이다. 이 발언을 한 여성은 '미스 디베이터(토론가)'. '프로젝트 디베이터'로 알려진 IBM의 AI(인공지능)였다.


13일(현지시간) 복스(vox), 포천지 등 매체들은 IBM이 6년간 개발한 AI와 인간 토론 챔피언인 하리쉬 나타라잔 간 대결이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도했다. 2016년 구글의 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은 것과 같은 파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AI가 또다시 인류 역사에 중대한 첫발을 내디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토론은 25분간 펼쳐졌다. 15분의 각자 준비시간과 4분간의 공개발언, 4분간의 반박, 2분의 마무리 발언 순으로 진행됐다. 보조금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택한 나타라잔이 종이 뭉치를 들고 훑어보는 사이, 보조금 찬성으로 논리를 펼치는 AI는 검은색 몸체 위에 새겨진 3개의 파란 원이 번쩍번쩍 빛났다. 수백만개의 문서에서 100억개 이상의 문장을 분석해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세를 펼쳤다. AI는 "좋은 유치원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도와 '가난의 굴레'를 벗도록 도울 수 있다"면서 "교육의 혜택을 받으면 범죄율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주장을 펼쳤다. 이들을 돕는 게 인류의 도덕적 의무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나타라잔은 "유치원 보조금은 중산층들을 위한 정치적 지원금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온전히 돌아가지 않는다"고 맞받아쳤다.

복스는 AI가 팩트 전달에는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감정 전달에는 부족함을 드러내 청중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토론 시작에 앞서 나타라잔에게 "당신이 인간 토론 챔피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아마 기계와는 단 한번도 토론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에 온걸 환영한다"는 농담을 건넸지만 목소리 톤 변화가 거의 없어 밋밋하게 들렸다는 것이다.

이날 참석한 800여명 청중의 토론 전과 후 입장 변화를 투표로 조사에 승자를 가리는 이번 대결에서, 유치원 보조금 지급에 찬성한다는 입장은 토론 전 79%에서 토론 후 62%로 17%포인트 떨어지며 AI가 패배했다.

하지만 팩트 전달 부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날 AI는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보고서를 인용하는 등 방대한 지식을 자랑해 참가자들 절반 이상이 AI가 지식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더 도움을 줬다고 손을 들어줬다. 게다가 바둑이나 체스, 컴퓨터 게임 등 정해진 규칙 안에서 승부를 펼치는 것이 아닌 비정형 대결에서 AI가 인간의 주장을 듣고, 분석해 재반박을 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IBM의 AI '프로젝트 디베이터'는 이날 대결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IBM은 금융, 의료계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상업용 AI를 개발할 예정이다. IBM 측은 "AI는 인간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