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 낮춘 '초등학교 한글', 아이들이 웃는다

한글책임교육 수업을 참관하는 유은혜 교육부장관.(2018.10.5)/사진=뉴스1

#2015년,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난 2학년 수민이(가명)는 한글을 전혀 읽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아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는 아예 가르치길 포기한 것 같았다. 센터 선생님들이 합심해 '수민이 한글 떼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수민이는 3달 만에 간단한 읽기 쓰기를 배웠다.

수민이와 같은 읽기 부진아는 한국 교육의 오랜 맹점이었다. 온 나라가 '문맹률 제로'를 뽐내는 사이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소외됐다. 선행학습으로 앞서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아이들은 의기소침해졌다. 초등학교 한글 교육의 의미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교육당국이 나섰다. 한글 수업시간을 대폭 늘리고, 읽기 교육 전문 인력을 학교에 투입했다. 새 교육과정으로 한글을 배운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다. '가나다 총력전' 3년차, 현직 교사들과 전문가들의 평가를 들어봤다.

◇ "백지 같던 아이가 한글을? 가장 큰 보람이죠"
교육부는 2017년부터 한글 교육에 힘을 바짝 줬다. 2017년 초등학교 1~2학년에 적용된 '2015년 개정교육과정'은 한글 습득 과정을 기존 27시간에서 68시간으로 크게 늘렸다. 교과서도 쉽게 바꿨다. 한글 자모음 모양을 익히거나 받침이 있는 글자를 읽는 한글 기초 습득 단원이 1학기 교과서 전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초등학교 1-1 국어교과서(가) 목차./조해람 인턴기자

시·도 교육청도 속속 동참하고 있다. 서울시는 기초학력향상사업을 진행해 신청 학교에 학습상담사를 파견한다. 학습상담사는 읽기 부진아에게 한글 자모음 쓰기와 같은 기초적인 교육부터 자아존중감 향상 프로그램 등을 한 학기 20여 회 진행한다. 또 희망 학교에 퇴직 교원들을 한글 강사로 연결해주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교사들은 이같은 '한글 책임교육' 정책에 만족하고 있었다. 서울시 노원구의 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 A씨는 "2학기 때면 한글을 뗀다는 교사 말만 믿다가 한글을 못 배운 채 2학년에 올라온 아이가 있었는데, 학습상담 등을 통해 꾸준히 배워 한글을 뗐고 자신감도 붙었다"며 "이미 잘하던 아이가 아닌, 백지 같던 아이가 발전하는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 강원도의 '공정한 출발선' 실험…철저한 지원으로 교사들 마음 움직였다
취재 중 만난 이들은 모두 강원도를 '모범사례'로 꼽았다. 강원도는 3년째 진행하는 '한글교육책임제'로 뚜렷한 성과를 냈다. 매년 약 3%에 달하던 읽기 부진아를 0.8% 수준으로 줄였다. 1학년 초 받아쓰기·알림장 등을 폐지하고 한글 자모를 체계적으로 가르친 결과다.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업무 부담 문제가 컸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강원도교육청에서 한글교육책임제를 담당하고 있는 손정환 장학사는 교사에 대한 '철저한 지원'을 강조했다. 손 장학사는 "처음 정책을 도입할 때만 해도 책임을 짊어지게 된 교사들의 거부감이 컸지만, 철저한 사전연수와 여러 정책지원으로 변화가 보이자 교사들도 동기부여를 받고 정책에 공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원지역 한 초등학교 교사 B씨는 "한글교육책임제와 더불어 협력교사 등 여러 보조적인 한글 교육 지원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워나가면서 즐거워하고, 자신감도 붙은 모습이 보인다"며 "학부모 입장에서도 한글을 배우고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덜해졌다"고 말했다.

강원 화천군 한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한글교육 책임제' 수업을 받고 있다.(2018.4.20)/사진=뉴스1

강원도는 왜 한글에 주목했을까. 손 장학사는 '공정한 교육'에 대한 요구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손 장학사는 "강원도는 대도시권에 비해 다문화·한부모가정 아동이 많아 문식성(글을 읽고 쓰는 능력) 격차가 컸다. 공정한 출발선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고 정책 도입 취지를 밝혔다. 강원도는 올해 해당 사업을 수학교과로도 확장해 운영하고 있다.

◇ 국가의 '공적 책무'엔 합격점, 과도한 '문자 습득' 집중은 경계해야
교육 전문가들의 평가도 좋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김태훈 정책부위원장은 "공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정책 방향이 바람직하다. 특히 입학 전 한글 사교육 부담을 많이 덜어준 점 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안순억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교육 비용 부담, 양극화로 인한 소외가정 아이들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는 '출발선의 평등' 지향 정책"이라면서 "교육이 사회와 관계하는 문맥에서 정책이 관점을 잘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문자를 습득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계는 초등학교 1학년(만6세)이니 우려할 것은 없다. 그동안의 교육과정이 한글 학습 부담을 부추겼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충남지역 교사들이 지난해 1월29~30일 '초등학교 한글수업 방법 개선 역량 강화' 연수를 받고 있다. 충남지역은 지난해 한글교육책임제를 도입했다./사진=충청남도교육청

단 주의해야 할 점도 있었다. 안 선임연구원은 "본질적으로 언어는 '기호체계'다. 아이들 자신이 실제로 본 사물에 대한 감각에 먼저 집중하게 하면, 언어라는 '도구'는 충분히 쉽게 습득한다"며 "가급적 기능적인 학습을 경계하고, 창의성을 길러 주는 체험과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이것이 문자교육의 본질적인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안 선임연구원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어린 아이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습 강요'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형태가 한글 교육에 대한 강박이며, 이는 오히려 도구적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기계적으로 인식하는 아이를 기르게 된다는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