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유동성관리하랬더니 '한국물'사들인 은행..내년부터 안된다

국내 은행들이 위기에 대비해 보유 중인 해외채권의 절반 이상이 KDB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해외서 발행한 ‘한국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은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한국물 비중을 전체 고유동성 해외채권의 50% 이하로 낮추는 유동성 규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21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이달 초 은행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을 개정해 내년부터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산출시 고유동성 자산의 국가별 한도를 설정하기로 했다. 외화 LCR 이란, 은행이 1개월간 예상되는 순현금 유출액(외화부채-외화자산) 대비 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고유동성 외화자산 비율을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현금화가 가능한 외화자산을 충분히 보유하도록 2017년 도입했다. 고유동성 자산에는 외화현금, 중앙은행 외화예치금, 해외채권 등이 있는데 은행들은 올해 LCR 80%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고유동성 자산은 유동성과 우량도에 따라 레벨 1, 레벨 2A, 레벨 2B로 나뉜다. 레벨 1은 해외 국공채 등으로 100% 우량자산으로 인정받는다. 레벨 2A와 2B는 각각 해외 금융채, 기업 발행 해외채권 등이 해당되며 자산의 85%, 50%만 고유동성 자산으로 인정해 준다.

국내 은행의 외화 LCR은 이달 초 기준 일반은행은 112.3%, 특수은행은 100.2%로 규제 비율 80%를 웃돌았다. 은행별로는 지난해 말 기준 KB국민은행 136.0%, 신한은행 123.1%, KEB하나은행 138.3%, 우리은행 108.9%이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조사결과 국내 은행들이 보유 중인 고유동성 해외채권의 절반 이상이 ‘한국물’이었다. 지방은행은 보유 해외채권의 100%가 한국물인 곳도 있다. 일부 시중은행은 한때 한국물 비중이 70~80%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 산은이나 수은이 해외에서 발행한 해외 채권이다. 국책은행이 발행한 해외채권은 레벨 1으로, 대부분 자산의 100%를 인정 받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산은이나 수은 해외채권은 고유동성 자산으로 인정 받는데다 한국물도 외화 LCR 규제상 특별한 제한을 받지 않다보니 은행들이 평소에 ‘잘 아는’ 한국물을 선호해 왔다”며 “미국 국채보다 국책은행 채권의 수익률이 40~50bp(0.4~0.5%포인트) 더 높다”고 설명했다.


이렇다 보니 정작 유동성 위기 때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국내 은행들이 외화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는 산은이나 수은도 같은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들 채권을 내다 팔려고 해도 곧바로 현금화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금감원은 한국물 쏠림현상을 막기 위해 내년 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6개월 간격으로 발행국가별 외화자산 인정 한도를 낮추기로 했다. 레벨 1 자산의 경우 2021년 1월까지 특정 국가 자산 인정 한도를 50% 낮추고, 레벨 2A와 레벨 2B는 각각 40%까지 낮아진다.

금감원은 또 해외 현지법인이나 지점에서 보유 중인 외화자산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은행 본점이 갖고 있는 외화자산 규모도 현재 파악 중이다. 현지법인 보유 외화자산은 현지 영업목적으로 활용되는 만큼 유사시 외화유동성 확보를 위해선 본점의 ‘체력’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일각에선 LCR 규제 개선으로 한국물 비중이 낮아지면 해외에서 한국물 수요가 쪼그라들어 국책은행의 해외채권 발행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통상 한국물의 국내 투자자 비중은 20% 가량이다. 은행을 비롯한 국내 기관의 한국물 수요가 높을수록 해외 투자자 유치가 쉬운데다 조달 비용도 낮아진다. 매년 연초 산은이나 수은이 해외채권 발행에 성공해 ‘흥행몰이’를 하면 뒤이어 국내 은행들이 해외 채권을 발행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특정국가 비중을 제한하는 것은 LCR 제도 취지상 바람직하지만 은행의 해외자금 조달과 자산운용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한국물에서 미국 국채로 갈아탈 경우 자산운용 수익률이 떨어져 순이자마진(NIM)도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