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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주의 PPL]'서울역 회군'이 없었다면 '5.18'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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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동주 기자
  • 2019.05.2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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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편집자주] People Politics Law…'국민'이 원하는 건 좋은 '정치'와 바른 '법'일 겁니다. 정치권·법조계에 'PPL'처럼 스며들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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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야 한다."

1980년 5월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금방 나오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임원들의 '대화'다. 지금은 유명 정치인 혹은 작가가 된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저 '대화'. 과연 진실일까.

'야사(野史)'처럼 전해오고 무한 복사돼 인터넷에 퍼져있는 저 '역사적 현장'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가짜뉴스'다.

그런데 저 대화는 어느 작가의 현대사를 다룬 책에까지 인용됐다. '정사(正史)'로 믿는 이들이 꽤 된다. 어느 방송사 언론인이 십수년 전 지금은 없어진 카카오다음 '아고라'와 정치인 팬까페에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올렸던 글의 일부가 편집돼 퍼진 게 저 대화다.

그럴듯한 글솜씨로 '5·15 서울역 회군'이 5·18의 비극을 불러왔다고 설파한 그 글은 1980년 이후 학생운동권이 5·18을 반성하며 세웠던 여러 가설 중 하나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비극'이 불러일으킨 '기억 조작' 혹은 '회한'


엄청난 비극 혹은 불행을 당하면 인간은 그 사건을 불러온 과정을 되씹으며 '과거 어느 순간' 스스로 통제가능한 다른 선택을 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으리란 회한에 빠진다.

그런 면에서 5·18의 비극을 당시 학생운동권 스스로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은 그 즉시 '5·15 서울역 회군'이란 결정이 수정됐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가능한 가정일까.

당시 사건에 깊게 관여했던 이들의 진술 자료로 복기해보자.

서울시내 30개 대학 10만여명이 도심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했던 1980년 5월15일. 이틀 전 13일부터 이어진 학생시위가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그날이 달랐던 이유는 각 학교 정문 앞을 굳게 지키던 전경부대가 길을 터 주고 교문 밖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강경하게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재야 정치인들과 운동권 지휘부가 공통되게 진술하고 있다.

서울역 광장에 모여든 학생들과 경찰의 대치 상태가 밤까지 계속되자 서울대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9개 대학 학생회장단들은 협의 끝에 자진 해산을 결정한다. 이수성 당시 서울대 학생처장도 이 자리에 같이 있었다. 인명 피해 우려와 시민들의 호응 부족 그리고 신군부에 빌미를 주지 말자는 의견이 결정의 근거였다. 당시엔 이날 집회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큰 회한의 대상이 되리라곤 그 당시 집회에 참여한 10만여명 중 누구도 알지 못했을 일이다.

사진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 시민들의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 모습.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사진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 시민들의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 모습.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photo@newsis.com




◇공동의 결론이 어느 순간 독단적 결정으로


누군가는 해산 결정이 서울대 내 비밀 학생운동조직의 지시였다고도 한다. 그게 아니라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학생회장단의 현실적 판단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군가의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단 게 공통된 증언이라는 점이다.

고(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1980년 11월9일 오전, 계엄보통군사재판 법정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1심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학생들이 교내 데모에 국한하기로 결의해놓고, 어째서 13일 가두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고 그 배후에 무엇이 있었는지 의혹을 품고 있다", "학생 데모가 절정에 올랐던 5월 13, 14, 15일에 성명을 발표해 데모의 자제를 호소했다. 나 개인으로 보아도 그러한 사태는 불리할 뿐이다"

결국 김 대통령은 13일부터 15일에 이른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신군부의 계엄 확대를 위한 빌미를 줬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계엄령 해제'를 위해 5월20일로 예정돼 있던 국회 개회를 막기 위해 신군부가 17일 밤 전격적으로 자신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잡아들이고 확대계엄령을 발표하는 동시에 광주에 특공여단을 보내 광주시민을 자극했다고 판단했다.

5·15 서울역 시위에 대한 이런 인식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피해자이자 피고인들로 모진 고문을 받고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던 당시 재야 지도자들이 2000년 공동 발간한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이라는 책에 반복 기술돼 있다. 즉 1980년 5월 야권 정치 지도자들은 격렬한 학생시위가 신군부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줄까 싶어 노심초사했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없어…불행한 과거도 역사

역사에 가정을 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1980년 서울역 집회가 청와대 진격으로 이어졌으면 4·19와 같은 학생혁명이 가능했으리라 주장하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신군부의 준비상태와 이후 전격적인 권력장악 과정을 보면 어쩌면 5·15와 5·18은 오히려 신군부의 계획에 포함됐을지 모른단 의심마저 설득력을 갖는다.

공식 자료와 관계자들이 책으로 남긴 당시 상황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터무니없는 소설이 계속 복사돼 읽히는 건 그만큼 5·18이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비극의 책임을 떠 넘기고 악마화하는 건 쉽다. 그렇게라도 나머지 영혼들이 덜 상처받고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다면 그 희생양은 억울해도 의미가 있을 순 있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불행한 과거도 역사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탓'으로 쉽게 넘어가고자 한다면 역사는 그 얕은 수를 허락하지 않을 지 모른다.

39년전 오늘 5월27일은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던 영령들이 산화한 날이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역사는 거짓없이 기억돼야 한다.



유동주 기자
유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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