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방지법의 역설…"텔레그램 잡겠다며 텔레그램 키운다"

"텔레그램 잡겠다며 카카오·네이버 등 국내 서비스만 잡는 결과만 초래할 겁니다. 역설적으로 텔레그램 등 해외 플랫폼 이용자만 늘어날 수 있습니다."


20대 국회가 전 국민의 공분을 산 'n번방' 후속 대책의 일환으로 인터넷 기업의 기술적 필터링을 의무화하는 정보통신망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관련 입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동 디지털 성범죄 예방에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대응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획일적인 기술적 필터링 의무화가 자칫 이용자들의 국내 서비스 플랫폼 이탈만 가속화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법 개정시 이용자 콘텐츠 검열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때문에 인권 침해 논란 소지가 다분한데 법의 구속력은 사실상 국내 기업들로 제한된다. 'n번방' 등 성착취 범죄자들의 소굴이 된 텔레그램이나 다크웹을 잡겠다는 법안이 되레 텔레그램으로의 망명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 박주민 최고위원, 진선미 의원, 서지현 검사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지난 3월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긴급 간담회에 앞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홍봉진 기자 honggga@

"합법 성인물과 불법 영상물 구분하려면 결국 사람이 검열해야"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7일 오후 전체회의를 n번방 사태 재발방지 방안을 담은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일부개정안’,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을 수정, 가결했다.


이들 법안에는 메신저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인터넷 사업자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등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전 이를 걸러내는 필터링 기술을 의무적으로 적용하고, 게시된 범죄물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최고 매출액의 100분의 3까지 과징금을 물리도록 돼 있다. 또한 불법 촬영물 유통방지 책임자를 지정하고 투명성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기존 법안은 불법촬영물 유통시에만 사업자가 책임을 졌지만 이번 법안 통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포함 디지털 성범죄물 전반을 사업자가 관리해야 한다. 규제대상도 웹하드, P2P사업자 등 특수유형 부가통신사업자에서 모든 인터넷사업자로 확대됐다. 과태료 규정은 최고 2000만원에 그쳤지만 이제 상한이 없어졌다.

현재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지난 2014년 카카오톡 일부 사용자가 텔레그램 메신저로 옮겨갔던 '디지털 망명'을 재현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인터넷 사업자들이 음란물 유통 방지를 위한 기술적 조치를 구현해야 하는데 사실상 콘텐츠 검열조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재 음란물 유통방지 기술로 동영상 해시값을 기반으로 필터링하거나 AI(인공지능)가 필터링하는 기술이 있긴 하지만 합법적 영상물과 불법 영상물을 판단하는 수준에까진 이르지 못했다.

김가연 오픈넷 변호사는 "디지털 성범죄물만 100% 골라내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합법적 성인물인지 성착취물이나 몰카 영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결국 대화방 내용을 사람이 들여다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플랫폼 사업자에게 디지털 성범죄물을 발견해야 하는 모니터링 의무를 지게 한다면 플랫폼을 이용하는 다수 선량한 이용자들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과 통신비밀의 자유가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노웅래 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사진제공=뉴스1

텔레그램 키운 디지털망명은 "수사기관이 내 대화 전부 본다" 불안감서 출발업계에선 텔레그램이 지난 2014년 카카오톡 감청논란 이후 국내 이용자 수가 급증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당시 텔레그램으로 이동한 이용자들은 특정 범죄 목적이 아닌 누군가 자신의 카톡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최민식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는 "(과거와 달리) 현재 SNS 상 대화내용은 대부분 종단간 암호화가 이뤄지고 서버에도 암호화 상태로 저장돼 대화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개정안에 맞춰 사업자가 대화내용을 들여다보기 위해 암호화를 포기한다고 해도 이는 이용자간 통신을 아무 권한 없는 사업자가 감시하는 셈이 된다"며 "국민의 기본권인 통신 비밀을 침해하는 사적 검열"이라고 규정했다.


"주소도 모르는 텔레그램, 과징금은 어떻게 물리나"인터넷 업계는 국내법 적용을 받지 않는 해외 사업자가 과거와 같이 반사이익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국회도 이러한 지적을 의식해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는 국외에서 이뤄진 행위도 적용대상으로 규정하고,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가 매년 방송통신위원회에 투명성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안을 담았다. 그러나 이조차도 역외 사업자에는 규제 강제력이 없다는 게 한계다.

IT업계 관계자는 "이날 과방위에서 처리한 법안 대부분이 해외사업자를 겨냥했지만 결국 국내 사업자 경쟁력만 약화시키는 법안"이라며 "규제 집행력이 없고 명확성이 떨어져 향후 어떻게 집행될 지도 예측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당장 법을 어겼을 때 내는 과징금도 국내외 기업이냐에 따라 달라질 판이다. 카카오를 예로 들면, 과징금을 산정할 때 최대 450억원(지난해 별도기준 매출액 기준) 가량 내야 하지만, 텔레그램 등 해외사업자는 최대 1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는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 개정안에는 매출액이 없거나 매출액을 산정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10억원 이하까지만 과징금이 부가되도록 돼 있기 때문. 이마저 텔레그램의 경우 국내 법인도 없어 과징금을 낼 가능성도 없다.

업계 관계자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유통방지 의무 강제부터 과징금 부과까지 국외 사업자에는 역외적용이 사실상 쉽지 않다”며 “‘n번방’ 사태를 막는다는 명분 하에 결국 국내 사업자만 잡는 법안이 마련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IT업계 관계자는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유통방지 의무 강제부터 과징금 부과까지 국외 사업자에는 역외적용이 사실상 쉽지 않다"며 "'n번방' 사태를 막는다는 미명 하에 결국 국내 사업자만 잡는 법안이 마련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방위는 관련 법안을 법제사법위원회로 넘길 예정이다. 20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 일정은 여야 차기 원내대표 선출 이후 의사일정 합의에 따라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