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수호자' 하륜, 마지막에 웃다

간만에 정통사극의 묘미를 맛보게 해준 드라마 '정도전'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이 드라마가 종반부로 치달으며 눈길을 끈 인물이 있다. 이방원의 책사이자 킹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한 하륜이다. 그는 새 나라의 창업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어쩐지 이렇다 할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륜에 대한 재조명은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원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국가를 꿈꾼 정도전과 달리 하륜은 권력의 현실적인 향배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 말에 이색에게 가르침을 받은 신진사대부이면서 동시에 이인임의 조카사위로 권문세족의 일원이었던 하륜은 어찌 보면 '경계인'이라 할 만하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는 온건개혁 노선을 걸었다.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일찍이 성균관대사성을 지내는 등 초창기엔 승승장구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이인임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소신은 굽히지 않았다.

하륜이 훗날 정도전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수난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하륜은 고려 조정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 처음에는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서 파직되었고, 다음에는 최영의 요동정벌을 만류하다 추방당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이색 계열로 몰려 눈 밖에 났다. 그는 급진적인 개혁이나 정책, 사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반기를 들었고 시련을 묵묵히 감수했다. 정치관은 온건했지만 흐릿하지 않았고 집요했다.


하륜의 온건개혁 노선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왕권으로 보인다. 그가 반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하로서 왕권을 넘어선 자들이었다. 신돈, 최영, 이성계 등은 무력해진 고려왕을 대신해 백성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하륜이 볼 때 그대로 놔두면 언제 고려가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이인임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다. 이인임도 권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고려라는 틀 안에서였고 왕권은 신성불가침이었다.

개혁은 추진하되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하륜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따라서 재상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이 그의 눈에는 위험하기 그지없었을 터. 세상에 왕은 백성의 도구일 뿐이고, 나라는 재상이 다스린다니. 신하의 권력이 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나라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것은 집념과 집념의 격렬한 충돌이었고 같은 조정에 몸담을 수 없는 패역이었다. 이때 하륜의 눈에 밟힌 인물이 바로 왕자 이방원이었다.

사실 조선 개국 초기의 이방원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었다. 원래 장성한 왕자가 후계자 자리를 놓치면 목숨이 위태로운 법이다. 집권세력은 후환을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특히 방원처럼 힘 있는 왕자는 1순위 제거대상이다. 실제로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내세우며 시시각각 이방원을 압박하고 있었다. 방원의 입장에서는 목에 칼을 겨누고 조여 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여야 했다. 하륜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이란 도덕과 무관하며 비정한 속성을 갖고 있다고 봤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이다. 드라마 '정도전' 최종회를 보면 이성계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너를 진즉 죽였어야 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이 두 사람의 허점이었다. 비정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권력의 향배에 밝은 하륜은 그 허점을 비집고 들어갔다. 왕권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방원을 설득했다.

결국 이방원은 살 길을 찾아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그 피를 양분 삼아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열었다. 하륜도 육조직계제 도입, 호패법 시행, 군제 개혁 등 왕권강화책들을 입안하며 소신을 펼쳤다. 그 후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나라로 발전했다.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 우위의 질서와 이방원이 추구한 왕권 중심의 질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600년간 이어진 것이다. 비록 사림에 의해 폄훼되기는 했지만 하륜이 조선에 끼친 공로는 가볍지 않다. 그는 왕권수호에 대한 집념으로 마지막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