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미리 내다본 '유니버설 뱅킹'

삼보증권의 목표는 노무라증권 못지 않은 세계적인 증권회사가 되는 것이었고, 벤치마킹 상대는 당연히 노무라증권이었다. 사진은 81년 6월 25일 한국을 찾은 아이다 유키오노무라증권 사장(왼쪽)을 초대해 환영 오찬을 하는 모습.

◇노무라·메릴린치 등 견학..'사무라이본드' 공동인수단에 국내사 최초 참여
증권회사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기업들이 우량의 자금을 장기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주식이나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인수하는 것도 다 이런 목적 때문인데, 1980년대 초까지도 우리나라 증권회사들이 취급하는 업무는 너무 단순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증권회사에 가면 주식과 채권뿐만 아니라 각종 공사채와 뮤추얼펀드 등을 판매해 고객들이 자신에게 맞는 투자 상품을 다양하게 고를 수 있었다.

나는 79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증권업계도 하루빨리 유니버설 뱅킹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증권회사를 금융백화점으로 키워 고객들이 모든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2009년부터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으로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우리 증권시장의 앞날을 너무 멀리 내다본 것이 아닌가 싶다. 80년대 들어 내가 열정을 갖고 추진한 국제화 업무도 그랬다.

당시 우리나라 주식은 한국사람만 투자할 수 있었고, 우리도 해외 주식을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나는 머지않아 증권시장이 개방돼 외국인도 국내 주식을 살 수 있고 우리도 해외 주식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증권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로 인한 외환사정 악화, 국내 금리와 국제 금리의 격차, 국내 주가가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는 점, 배당금의 국외 유출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무역 자유화가 가속화될수록 증권시장의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자본시장도 확대돼 우리 기업들의 직접 금융 창구도 넓어지고 국내 증권업계도 질적으로 한 차원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뭘 보고 알아야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라증권과 메릴린치 같은 외국의 대표적인 증권회사를 방문해 이들의 경영 목표와 국제화 경험을 배웠다. 요즘 같으면 눈에 띌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증권회사 사장이 해외출장을 가는 경우조차 드물었던 시절이다. 나는 당시 삼보증권 국제담당 고문을 맡고 있던 김태권씨와 동행해 정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김 고문은 서울대 문리대 출신으로 미국 롱아일랜드대학에서 MBA 학위를 받고 성도증권 사장을 지냈는데, 국내 증권업계에서 손꼽히는 해외 증권시장 전문가답게 삼보증권의 국제화 업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직원들도 노무라증권과 메릴린치에 정기적으로 연수를 보내 선진 투자 제도를 배우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기억나는 게 하나 있는데, 메릴린치에 파견돼 6주간 교육을 받은 김성호 대리가 미국의 증권외무원 자격까지 따낸 일이다. 일종의 투자상담사라고 할 수 있는 외무원 자격을 한국인이 따낸 것은 그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증권사 1호' 국제부 신설.."경제규모·무역 확대 땐 증권시장 개발 불가피"

삼보증권은 우리나라의 첫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인 코리아 트러스트(KT)에 국내 증권사로는 유일하게 공동 간사로 참여했다. 사진은 81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KT 인수 조인식에서 대한투자신탁 류돈우 사장(왼쪽)이 서명하고 있는 모습.

아무튼 이런 노력의 결과로 80년 10월 산업은행이 발행한 엔화 표시 산업금융채권, 일명 '사무라이 본드'의 공동인수단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증권회사가 국제 인수단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시 발행 규모는 100억엔, 발행가액은 액면가의 99%, 표면 금리는 연 9.0%, 만기는 10년이었고, 노무라증권이 주간사, 공동간사는 야마이치증권과 닛코증권, 다이와증권이었다. 국제 인수단에는 모두 38개 증권사가 참가했는데, 메릴린치 도쿄지사가 가장 많은 3억3000만엔을 인수했고 삼보증권은 2500만엔을 인수해 판매했다. 이를 시작으로 82년 3월에 한 차례 더 산업은행이 발행한 사무라이 본드의 국제 인수단에 참가했고, 83년 3월에는 마르크화 산업금융채권의 국제 인수단에도 참가했다.


81년 11월에는 대한투자신탁과 한국투자신탁이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인 코리아트러스트(KT)와 코리아인터내셔널트러스트(KIT)를 발매했다. KT와 KIT는 각각 1500만달러 규모였는데, 삼보증권은 국내 증권사로는 유일하게 KT의 공동 간사로 참여했다. KT와 KIT에 이어 84년 5월에는 국내 증시에 외국인이 직접 투자할 수 있는 최초의 펀드인 코리아펀드가 설립됐다. 코리아펀드는 알다시피 1차로 6000만달러 규모의 펀드 주식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해 곧바로 매진되는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국내 주선회사(스폰서)를 맡은 곳이 대우증권으로,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삼보증권과 동양증권이 합병한 회사다.

나는 한국에도 노무라증권 못지 않은 세계적인 증권회사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81년 9월 국내 증권회사로는 처음으로 국제부를 신설해 국흥주 부장을 비롯한 10명의 엘리트 직원을 배치했다. 업계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떠들었지만 비록 당장 수익은 나지 않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 시작한 것이었다.

앞서 발행시장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제일 먼저 조사부를 만든 삼보증권이었다. 전국적인 지점망을 구축해 주식시장 대중화를 선도한 것도 삼보증권이었다. 이제 자본시장의 국제화를 이끌 차례였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먼저 시작하면 위험도 따르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결국 다른 증권회사들도 다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물론 젊은 기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정부의 정책 방향도 자본시장 개방 쪽으로 잡혀 있었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으니 이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좌초하게 됐다. 그것도 작은 돌부리에 채인 게 아니라 거대한 암초에 부딪쳐버린 것이다.

삼보증권 인수 19년만에 어이없는 좌초.."고객 손실 10원도 없도록" 전재산 내놓고 물러나

세계적인 금융투자 전문지인 인스티튜셔널인베스터(Institutional Investor) 83년 1월호에 실린 삼보증권의 영문 광고. 자본자유화도 되기 전 과감히 증권회사부터 알린 파격적인 광고였는데, 문안은 국흥주 국제부장이 직접 영문으로 작성했다.

나중에 정치권에서 '삼보증권 사태'로까지 부르게 된 시재금(時在金) 부족 문제는 82년 12월 한 직원의 투서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것이 검찰과 증권감독원 조사를 거쳐 삼보증권과 동양증권의 합병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때는 이런저런 억측과 설(說)들이 난무했지만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었고 내가 회사 경영을 잘못했다는 점이다.

나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면 바깥에서 어떤 압력이 들어왔어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당시 시재금 부족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창구사고가 빈발했기 때문인데, 다른 증권회사에서도 이런 일이 잦았다. 그런데 나는 직원들이 회사 자금을 유용하거나 고객들한테 회사 돈을 빌려주고 떼였을 경우 반성하면 그냥 넘어갔다. 그때 사고를 일으킨 직원을 일벌백계로 처리해야 했는데 '한번 용서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사고가 터지다보니 뒤늦게 바로잡으려 했으나 너무 커져버렸던 것이다. 경영상의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사태 수습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처음에는 회사채를 발행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전에 다른 증권사도 시재금 부족으로 비슷한 문제를 겪었는데 당시 회사채를 발행해 해결한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재무부에서 난색을 표명했다. 결국 방법은 합병밖에 없었다. 그것이 증권시장의 공신력을 살리고 고객과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강경식 재무부 장관을 찾아가 내 결심을 밝혔다. 회사를 팔아 문제를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더니 강 장관은 합병할 회사로 어디를 마음에 두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우그룹 계열사로 당시 삼보증권에 이어 업계 2위였던 동양증권이 적당하겠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대우센터 빌딩에서 김우중 회장을 만나 한마디로 담판을 지었다.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삼보증권 전 직원의 고용 계약 승계와 고객 계좌 100% 인수에 합의했다.

"고객들에게는 10원의 피해도 주지 않겠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할 내 다짐이었다. 이런 각오 덕분이었는지 시재금 부족 사태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기간 중에도 삼보증권의 약정고는 오히려 늘어났다. 그 정도로 고객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점이 아직도 참 고맙다.

부족한 시재금은 내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팔아 메우기로 했다. 내가 살고 있던 안암동 집을 비롯한 모든 부동산과 포항축로 주식을 포함한 모든 유가증권 및 현금을 내놓았고, 아내가 고향에 선산 용도로 사두었던 임야와 전답까지 다 팔았다. 또 내가 보유한 삼보증권 주식은 대우그룹 측에서 100억원에 매입했는데 이것도 내놓았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분가한 둘째 아들네로 갔다. 삼보증권은 83년 12월19일 대우증권에 흡수 합병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삼보증권을 인수한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 주가 30% 폭락, 잔인했던 '여의도의 봄'
[강성진의 증권반세기-2] 증권사 사장단 결의…'암덩어리' 깡통계좌 정리
[강성진의 증권반세기-3] "여윳돈 놀리느니 증권 사라"
[강성진의 증권반세기-4] 증권가의 제왕, 시장 쥐락펴락
[강성진의 증권반세기-5] 100배 솟구친 주식이 1/200토막…
[강성진의 증권반세기-6] 끝날 줄 모르는 탐욕에 또 다시…
[강성진의 증권반세기-7]절망은 다시 희망의 씨앗으로
[강성진의 증권반세기-8] 바람 잘 날 없는 증권가
[강성진의 증권반세기-9] 국민소득 100불도 안되던 그 시절…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0] 공개매수 도입 전 최대 운송업체 인수戰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1] 증권파동 겪고 기업공개 활성화법 열매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2] 70년대 처음이자 마지막 증권파동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3] 지친 심신 돌려세운 정부 '시그널'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4] 공채로 인재선발..혁신적 기업문화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5] 증권업계 첫 '기업공개 주선'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6] 전국 지점망 구축, 증시 대중화
[강성진의 증권반세기-17] 주식 대중화 앞당긴 공모주 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