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의 증권반세기]격동의 세월 이겨낸 원동력은 '사람'

삼보동우회 주관으로 2012년 6월 경기 양평의 초은당에서 열린 삼보증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예전 여직원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는 필자. 삼보증권이 합병된 뒤에도 삼보동우회는 매달 모임을 갖고 있는데, 이날 행사에는 100명이 넘는 사우들이 참석했다.

현직 떠났어도 옛 동료 만나는 즐거움..돈·원자재·사람 중 핵심은 사람
지난해 12월 15일은 내가 공식적으로 증권업계에서 은퇴한 날이다. 삼보증권 출신 사우가 설립에 참여한 게 인연이 돼 맡았던 BNG증권 명예회장 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몇 달 앞서증우회 명예회장도 그만두었으니 1958년 첫 발을 내디딘 지 햇수로 55년만에 증권업계를 완전히 떠난 셈이다.


그 사이 어려운 고비도 참 많았지만 다행히 무사히 잘 넘어왔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산 증인"이라고 하는데, 돌아보면 파란만장했다고 할 만큼 굴곡졌던것 같지는 않다. 물론 시장이 안 좋아 고객들이 손실을 보거나 증권 파동으로 회사가 피해를 입었을 때는 무척 괴로웠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내가 발을 잘못 들인 게 아닌가”하고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힘든 시기를 헤쳐 나온 데서 오히려 보람을 느낀다.

지나고 보면 새삼 남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도 삼보증권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을 볼 때가 제일 즐겁다. 비록 삼보증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나는 실패한 경영인이지만, 삼보동우회에서 옛 얼굴들을 만나면 나는 행복한 경영자라는 생각이 든다. 83년 삼보증권이 합병될 때 조사부 막내로 일하던 여직원이 어느새 증권회사의 중견 부장으로 활동하고 있고, 대졸 공채로 들어온 신입 직원이 어엿한 증권회사 대표가 돼 있다. 이보다 더 고맙고 뿌듯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기업 경영의 기본은 이윤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우수한 기업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3M, 그러니까 돈(Money)과 원자재(Material), 사람(Man)이라는 3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하는데,그 핵심은 다름아닌 사람이다. 얼마나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느냐가 기업의 성패를 가르고, 최고경영자의 능력 역시 얼마나 뛰어난 인력을 키워내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국제부 이야기(18회)를 하면서 잠깐 언급했지만 회사로서는 수익이 나지 않는데도 10명이 넘는 엘리트 직원을 투입해 부서를 신설한 이유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손익보다 그렇게 해서 미래의 인재를 키워내는 게 긴 안목으로 보면 훨씬 더 중요하다. 다만 수익성에 민감한 기업 특성상 당시 업계 선두였던 삼보증권이 이런 일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증권업계 최초로 조사부를 신설한 것이나 전국적인 지점망을 구축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5월 BNG증권 명예회장 취임 후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습. 필자 왼쪽이 임철규 BNG증권 사장으로 삼보증권 기획실 차장 출신이다.

요즘도 매달 삼보증권 동우회 모임이 열린다. 삼보라는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삼보증권 임직원들은 증권업계에서 각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삼보증권이 발행시장에서 발군의 실적을 낼 수 있도록 인수공모부를 지휘했던 명호근 부장(이하 삼보증권 재직 시 직책)은 1년에 구두를 몇 차례나 갈아 신어야 했을 만큼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명 부장이 기획실장 시절 처음 만든 업무규정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증권업계의 전범처럼 이어지고 있다. 명 부장 역시 나처럼 평생을 증권업계에 투신해 쌍용투자증권사장과 회장을 역임했고 20년 넘게 삼보동우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명동 증권거래소 시절부터 활동했던 김성규 이사는 “시장부”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우풍상호신용금고 대표를 지냈다. 채권부 과장으로 아주 탁월한 영업 능력을 보여주었던 이승배 군은 고려증권 소공동 지점장으로 재직하면서 전국 최고의 약정고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고, 훗날 삼보증권 출신들과 함께 투자자문회사를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삼보증권 공채 1기였던 전영상 군은 한일투자금융 사장을 역임했고,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기획실장을 지낸 김영용 군은 전자신문 사장과 한국경제신문 사장으로 일했다. 또 한신증권 사장을 지낸 오세호 상무와 고려증권 사장을 지낸 이연우 영업부장,쌍용화재 사장을 지낸 김재홍 여의도지점장, 산은증권 상무를 지낸 남상명 채권과장도 삼보가 키워낸 인재였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글로벌화하는 과정에서 삼보증권 국제부의 초창기 인력이 핵심적인 역량을 발휘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대우증권과 쌍용투자증권에서 코리아펀드와 코리아유로펀드를 출범시키는 데 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했다.

초대 국제부장을 맡았던 국흥주군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합병 후 쌍용투자증권 국제부장과 런던사무소장으로 일했다. 과장이었던 이원익군은 쌍용투자증권 뉴욕지점장과쌍용투자자문 사장을 지냈고, 역시 과장이었던 구자삼 군은 대우증권 런던법인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리였던 서부택 군과 황철관 군은 각각 씨티뱅크증권 사장과 쌍용투자증권 도쿄지점장을 역임했고, 81년 7월에 입사한 송윤빈 군은 대우증권 취리히지점장을 거쳐 노루홀딩스 CFO를 지냈다. 역시 81년 12월에 입사해 조사부에서 일했던 신성호 군은 국내 리서치 분야의 개척자로 현재 IBK증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증권 이사를 지낸 최덕근 초대 조사부장,쌍용템플턴투자신탁 사장을 지낸손우헌2대 조사부장,지점 관리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이호수 대구지점장, 삼보증권 인수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이득주 전무,삼보증권에 감사로 들어와 회사 안살림을 도맡아 주었던 강성대 부사장, 어려운 시절 늘 내 곁을 지켜주었던 엄길갑 비서실장도 잊을 수 없다.

일확천금은 없다…상식적 투자해야, 여유돈을 투자하되 공부는 끝없이, 개척자 정신 가지면 고난이 기회로
오랜 세월 증권업계에 몸담았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나의 투자 철학을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투자는 상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무모한 생각을 갖고 일확천금을 노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경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증권업협회장에서 물러난 뒤 아내(오른쪽에서 두 번째), 큰아들(왼쪽에서 세 번째), 막내딸(오른쪽첫 번째), 손주들과 함께 고향 선산을 찾았다.

모름지기 투자는 여유자금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증권시장에서 잘 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기업 실적과 주가수익비율(per) 같은 건전성 지표를 따져가며 투자를 하는 것은 물론절대로 신용거래는 하지 않고 자기 돈으로만 투자를 한다. 또 시장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거래도 자주 하지 않는다.

말로는 쉬운 것 같지만 이런 원칙이 몸에 배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삼보증권 직원과 투자자들에게 공부하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나 역시 증권업계에 입문했을 때는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같이 신문에 난 경제 관련 기사를 꼼꼼히 챙겨 보고 당시 주로 일본에서 나온 증권서적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증권업계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다니며 증권시장의 생리와 흐름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상투 사흘 바닥 백일”이라든가 “주가는 귀신도 모른다. 오직 주가만 안다” 같은 격언들은 오랜 세월 증권가에서 회자된 것들인 만큼 마음속에 새겨둘 만한 경구(警句)들이다.

마지막으로 증권업계 구성원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증권시장은 투자자와 상장기업, 증권회사가 움직이는데, 이들 가운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곳이 증권회사다. 지금 우리나라 자본시장은 내가 삼보증권을 경영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증권업계 구성원 모두가 자본시장을 대표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개척자 정신을 발휘하기 바란다. 그러면 최근 증권업계가 직면한 고난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질녘 노을이 더 아름답고 잎 진 뒤의 귤이 더 향기롭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다 소중하다. 이 글을 연재하는 중에 아내가 낙상해 수술까지 받았다. 걱정도 컸지만 내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젊은 시절 아내는 중이염으로 두 번이나 입원해 수술을 받았는데, 남편인 나는 한 차례도 병원에 가보지 못했다. 아내뿐만이 아니다. 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동안 아버지인 내가 입학식과 졸업식에 가본 기억이 없다. 딱 한 번 막내딸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건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학교 후원회장 자격으로 자리한 것이었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한시도 시장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학식이든 졸업식이든 다 평일 장중에 열리다 보니 그 시간을 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을까 싶고, 후회되는 것도 사실이다. 시세 움직임에 그렇게 민감할 필요가 없는데 젊을 때는 그걸 잘 몰랐던 것 같다. 시장은 계속 열린다. 그러나 인생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부질없지만 내 마지막 조언을 전하는 것으로 그동안 귀중한 지면을 소모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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