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親日)로 이어진 근대국가의 꿈

"전하, 신은 역적이 아닙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나라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을 빌린 것에 대해 비평하는 자가 있으나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청국은 조선을 보호해 줄 힘이 없거니와, 일본도 믿을 바는 못 됩니다. 지금 폐하는 어떤 방책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가십니까?"


1889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갑신년의 거사', 즉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취지를 환기시키고 간절한 마음으로 임금의 이해를 구한 것이다. 갑신정변은 그를 중심으로 급진적인 개화당이 신분의 차별이 없는 근대국가를 꿈꾸며 일본군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새 시대의 주역이 될 아까운 인재들의 떼죽음을 부르며 나라를 의도치 않은 파국으로 몰고 간다.

최근 종영한 KBS 드라마 '조선총잡이'는 개화기의 격동에 휘말린 남녀 주인공의 안타까운 운명을 다뤘다. 이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1884년 10월 17일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축하연에서 수구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조정을 장악하려고 했다. 연회에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자 그들은 고종에게 거짓보고를 올리고 대신들을 소집하게 했다. 어명을 받고 권신 민태호와 군대 수장들이 입궐하자 주저 없이 처단했다.

거사가 얼추 마무리되자 개화당은 서둘러 혁신정강을 발표한다. 김옥균의 수기인 '갑신일록'에 그 가운데 14개 조항이 실려 있는데 특히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한다',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백성을 구제한다' 등이 눈에 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이나 구미열강에 뒤쳐지는 원인이 양반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양반들이 전횡을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굴기 때문에 국운이 융성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김옥균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힘이 백성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던 것 같다. 문제는 이러한 취지와 달리 거사를 추진한 방식은 철저하게 백성과 유리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다케소에 공사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총칼을 빌려 자국 대신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일으킨 정변이라도 지지와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월 19일 아침이 되자 당시 서울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민씨 일파의 요청을 받고 창덕궁 주변을 에워쌌다. 백성도 일부 가세했다. 개화당이 임금과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교전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고종이 궁궐을 빠져나간 탓이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급진적인 개화당뿐 아니라 개화세력 전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조선의 개화세력은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오경석, 박규수, 유홍기가 후진들을 길러내며 개화론은 거세졌다. 시대를 앞서간 역관 오경석은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으며, 행동하는 의사 유홍기는 그들의 정신적 멘토를 자임했다. 그렇게 키우고 확산시킨 인재들이 한꺼번에 갑신정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무려 570여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제국주의 열강에게 맞서려면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 삼아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모색했다. 하지만 외세를 등에 업은 위로부터의 혁명은 사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귀중한 인적자원들을 희생하며 개화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이 땅에 친일파가 독버섯처럼 자라난 것도 이런 혼란상과 무관치 않다.

1894년 3월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그 주변에는 '대역부도 죄인'이라고 쓴 천이 나부꼈다. 김옥균의 비참한 최후는 개화당 동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살아남은 급진주의자들은 냉소적으로 바뀌어갔으며 박영효 등 일부는 친일파로 변신하기도 했다. 조선은 그렇게 자주적인 근대국가가 아닌 식민지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