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몽환을 잘게 썰어 즙을 빨아 먹는 아침

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화려하다. 화려한 색과 무늬로 자신을 드러낸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드러내는 과감하게 행위는 일종의 경고다. 나는 독을 가지고 있으므로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그들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독은 공격용이라기보다 방어용인 셈이다. 이화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나비’라는 화려한 색과 무늬 뒤에 ‘우울’이라는 자기방어용 독을 감추고 있다.


포도 알의 탐진 냄새가 너울거리는/ 칠월 한낮,/ 저 냄새라면 내 우울의 뿌리를 쑥 뽑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들떠 홀로 중얼거리는 말// 신생아는/ 산모가 느끼는 고통의 열 배를 받으며 세상에 나온 열매/ 뿌리까지 우레 같은 고통을 쓰느라 일그러진 포도나무/ 저 알들은 포도나무가 제 우울을 치유한 뒤의 달콤(중략)
-‘우울에 대한 서술’ 일부

‘우울의 뿌리(근원)’는 “산모가 느끼는 고통의 열 배를 받으며 세상에” 나올 때의 고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아가면서 차츰차츰, 혹은 어느 순간에 생긴 우울이 아닌 원초적이라는 것이라 ‘왜 태어났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인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이하 ‘우울에 대한 서술’) “내 속 방 한 칸”에 “고통을 가두어 밀폐시키고 싶은데” 오히려 “내 속의 방이 확장되는 소리를” 듣고, ‘몸속에 사원’을 만든다. 미궁 같은 도피처인 셈이다. 확장된 고통은 우울을 동반한다. 우울이라는 독을 가진 나비는 화려하지만, 화려하지 않다. 배고프고, 눈을 감고, 날개를 접고 날개를 쓸쓸히 핥는다(‘나비가면’). 날개를 펴는 법을 잊은 나비는 “젖은 날개를 결 따라 천천히/ 한 장씩 찢어 날리기"까지 한다.

긴 몸만큼이나 긴 거부/ 수뱀의 관능이 목울대 쪽으로 빠르게 올라간다/ 순간,/ 핥던 목에 독니를 콱 박는 수뱀// 정글의 하루는/ 애무와 죽음이 자웅동체로 내린다// 얼굴 붉어지던 심장의 고동 소리도/ 단단한 가슴이 주던 달콤함도/ 본능의 행성은 서늘하고 어둡다/ 짐승의 시원(始原)은 송곳니와 독// 애무와 애원 사이에는/ 당신도 나도 모르게 키우는 독니 하나 있다
‘애무와 애원 사이’

안으로 침잠하던 우울은 신화적 상상력과 몽환적 서사로 표출되고, 이 둘을 아우르는 것이 ‘관능’이다. “인도 열대우림/ 코브라 수뱀이 여왕 뱀에게 다가와 유려한 애무를 펼친다”. 하지만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연이틀 달무리 피고 질 때까지 다른 수컷과/ 수십 번 날아오른”다. 이건 섹스가 아니라 고문이다. 여왕이지만, 여왕이 아니다. 사랑도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심지어 도망가는 여왕 뱀의 “목에 독니를 콱 박는”다. ‘애무와 애원 사이’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근원적이던 고통이 남성적 폭력에 의해 더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 몸에 두 온도를 가진 계집”(‘사루비아’)이지만 마음에 ‘독니 하나’ 키우고 있기에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인 것이다.


이화영 시인(2009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의 신화적 상상력과 몽환적 서사는 ‘미궁의 흰 소’, ‘숨소리, 어미곰 자리’, ‘몸이 바뀌는 시간’, ‘마녀 백설공주’ 등의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마녀 백설공주’의 “몽환을 잘게 썰어 즙을 빨아 먹는 아침/ 혹, 이 과즙은 백설공주가 씹다 남긴/ 독이 든 사과”라는 구절은 이 시집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준다.

◇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이화영 지음. 한국문연(현대시) 펴냄. 128쪽/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