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본 안톤 체홉의 '갈매기'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이 가을이 떠나면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오겠지만 아직 가을이 끝나지 않았음에 조금은 위로받고 싶다. 한국의 산천은 오색 단풍으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행락객의 발길도 여기저기로 바쁜 것 같다.

며칠 전, 탤런트 겸 연극인이자 화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K씨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보러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리 속에 전광석화처럼 러시아에서 보았던 연극이 생각났다.


필자가 러시아에서 연극을 보게 된 계기는 옆집에 사는 그루지아 출신의 모스크바 대학원생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는 그루지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원으로 유학을 와서 친척집에 살고 있었다. 빼빼 마른 몸매로 커다란 두 눈을 가지고 창백한 안색을 가진 아주 이지적인 아가씨의 친척집이 필자의 옆집이었고 자주 놀러간 집이었다. 그곳에서 '리카'라는 이 아가씨를 만났는데 러시아 말을 전혀 몰랐던 초창기 때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카와는 뭔가 교류되는 게 있었던지 같이 외출도 하고 동물원에도 놀러가고 필자가 아팠을 때 어린 딸을 데리고 레슨까지 다녀오곤 했다. 우리는 서로 따뜻한 고향을 떠나 추운 객지에서 오로지 학업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사는 슬픔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리카는 저녁을 먹은 후 필자를 데리고 무작정 나가자는 것이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리카를 따라나섰는데 그녀와 내가 도착한 곳은 작은 극장이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리카는 연극광이었고 한국으로 치자면 지금의 혜화동에 있는 소극장 수준이었다). 아무튼 말도 모르고 그녀를 따라가서 처음으로 러시아 연극을 보게 된 것이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였다. 러시아 말을 전혀 모르는 필자는 배우들의 말투와 몸짓과 동작들만 주의깊게 보고 들었는데 배우들은 아주 진지하고 관객들도 그에 못지 않았다. 러시아에 살면서 차츰 알게 된 것은 연극이 엄청나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에는 500여개의 극장들이 있고 극장마다 극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연극 환경일 것이다. 극장은 대부분 국립이나 공립이고 극단이 포함된 상설극장이라니 사실 꿈같은 이야기다. 그것도 장르별로 오페라 발레극장, 뮤지컬 코메디극장, 아동극장, 드라마 코메디극장 등으로 구별되어 있고 자기 취향대로 선택해서 러시아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다니는데 가을부터 겨울까지 극장들은 늘 북적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과 '세 자매'도 리카와 같이 본 연극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예술을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에 살아 본 사람들은 격하게 수긍을 할 것이다.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의 의사이자 소설가 겸 극작가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며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알려졌다. 그는 우여곡절의 삶을 살면서 톨스토이의 영향으로 1890년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을 여행한 후 인간 본질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은 '사할린 섬'이라는 여행기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국 현실의 삶과 꿈꾸는 삶의 이중성을 간파했고 그 점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갈매기'라는 희곡이었는데 자서전적이며 초연에 실패했지만 4대 희곡 중의 하나다.


리카와 연극을 보고 온 즈음 한국에서 유학 온 연극과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는데 주말이면 작정하고 필자의 집에서 불고기에 밥을 먹기 위해(그때만 해도 한국식 밥을 먹기가 어려웠고 연극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형편이 어려워 힘들어했다) 먹으러 놀러온 기억이 있다. 특히 국립 슈우킨 연극대학은 러시아 최고의 연극학교였고 공부하는 과정의 강도가 얼마나 강하던지 새벽 1시까지 학교에서 연극연습을 하곤 했다. 필자는 리카로 인해 러시아 연극을 보았고 한국 유학생들의 시험 작품이나 졸업 작품을 감상하곤 했다.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렀고 한국에서 '갈매기'를 보러 가자는 말에 문득 잊고 있었던 옛 시절이 그리워졌다. 깊어가는 가을에 연극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