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처톡톡] 늦가을에 두 여인을 문득 추도하며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1589년 허난설헌 그녀가 스물일곱이란 나이로 죽기 1년 전, 문득 기이한 꿈을 꾸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시 '몽유광상산시'다. 광상산은 신선세계 10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산이다. 중국의 석학들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하며 다투어 시를 베꼈던 조선 중기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이렇게 갔다.

지금은 그로부터 400년이 더 지난 2015년. 과천 집 밖에 낙엽이 붉게 물들다 며칠째 가을비에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양을 보니 문득 '허균평전'에 소개된 허난설헌이 가슴을 헤집고 들어온다. ‘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왜 조선에서 낳았고 하필이면 왜 유교국가에서 여자로 태어났고 하필이면 왜 그 많은 남자 중에 신랑이 남인 가문 김성립이란 말인가?’란 말로 조선 여자의 운명을 한탄했던 허난설헌. 성리학 이념을 고수했던 남인 가문의 남편 김성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싸우다가 전사해서 시신도 찾지를 못했으니 그를 나쁘다고만 할 순 없다. 허난설헌은 8세 때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한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시는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아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한다. 허난설헌(본명 초희)은 신선세계로 가는 시를 많이 지었다. 조선의 현실은 여자로 태어난 그녀에게 너무 추운 곳이었기 때문일까.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북인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문장가인 오라버니 허봉, 동생 허균 사이에서 시재를 뽐내며 자라난 허난설헌. 남존여비의 원칙을 간직한 남인 집안 평범한 남자와의 결혼은 파멸이 예고된 길이었다. 결혼할 때 그녀 나이 겨우 15세. 행복은 15년 동안만 주어졌다.


여기 또 한 여인이 있다. 허난설헌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오버랩 된 여인이다. “당신께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내게 완전한 행복을 주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당신보다 더 잘해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믿어주시겠죠. 하지만 나는 이걸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요. 나는 당신의 삶을 소모시키고 있어요. 이 광기가 말이죠….”라고 남편 래너드에게 편지를 남기고 그녀는 모피 코트 차림에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봄이 되어 날씨는 따뜻했고 강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그녀는 강둑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강물로 들어갔다. 1941년의 일이었다. 박인환이 시 '목마와 숙녀'에서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그녀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던, 어린 시절 겪었던 이별과 고통 때문에 평생 광기에 시달려야 했던 여류 문인 버지니아 울프다.

두 여인은 나라도 달랐고 시대도 달랐다. 여성에 대한 대우도 달랐지만 둘 다 페미니스트였고 타고난 문(文)의 여인들이었다. 한 여인은 하늘이 데려갔고 한 여인은 광기가 삶을 거두었다. 파란 난새와 채색 난새가 어울리는 세상에서 문득 세상에 나와 붉게 떨어지니 두 여인에게는 차갑기만 한 삶이었다. 늦가을 우울한 하늘 때문인가, 낙엽이 너무 붉어서인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