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플랫폼] 기억의 위탁

머니투데이

이대연 평론가

해외로 입양 된 아이가 성장하여 고국에 온다. 한국 가정으로 입양 된 여동생을 찾기 위해서다. 방송국에 출연신청을 하자 제작진이 수소문 끝에 동생으로 추정되는 여성을 찾아낸다. 오누이는 방송국에서 재회하지만 상대를 신뢰하지 못한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조심스럽게 서로의 기억을 탐색한다. 헤어질 때의 날씨와 장소, 분위기, 입고 있던 옷 따위를 주고받는다. 하나씩 들어맞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윽고 모든 기억이 일치하자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헤어질 때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남매 뿐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방영됐던 TV프로그램 얘기다.

이를테면 기억이란 이런 것이다. 한 개인의 인생의 누적치이며 존재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기제이다. 기억이란 개인이 감정의 맥락 안에서 세계와 소통하고 교감한 흔적이다. 흔적은 흡착성 물질처럼 주변의 사물에 달라붙어 기억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면 기억은 심해어처럼 가라앉는다. 시간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다가 그것을 환기시키는 어떤 물질과 조우할 때 생명을 얻고 부활한다. 선과 면과 색이, 향기와 맛과 촉감이, 사랑과 아픔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러나 현재라는 시간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그 시간으로 불러들인다. 기억이란 떠올린다기보다는 과거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그런데 디지털 기억 속에는 감정의 맥락이 없다. 입력과 재생이 있을 뿐 교감은 없다. 시간과 공간도 없다. 시간이 없으니 되돌아갈 과거가 없고 공간이 없으니 흔적이 달라붙을 물질이 없다. 물질이 없으므로 단조롭게 반복되는 0과 1의 조합은 재생될 뿐 환기되지 않는다. 공유될 수는 있으나 개별성을 말해주지는 못하고 데이터는 있지만 기억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저장’이라고 부른다.

저장이란 0과 1로 조합된 기호와 이미지를 디지털 기억장치에 보관하는 일이다. 카카오톡은 사적인 대화들이 주로 오가는 곳이다. 지극히 사적인 나의 대화들이 저장되고 누군가에 의해서 열람된다는 것은 확실히 불쾌한 일이다. 사이버 망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불쾌감의 근원에 기억의 부재가 있다. 데이터는 생산되고 축적될 수는 있으나 결합할 수 있는 물질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하는 존재로서의 나와 그 안에서 교차하고 교감하는 의지와 감정, 표현의 가치들이 담기지 않는다. 데이터는 이미지로, 통계로, 검열의 대상으로 소비될 뿐이다. 카드회사가 저장하는 카드사용내역은 나의 소비패턴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뿐이며, CCTV의 기록은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할 뿐이다. 적어도 비자발적 저장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생활 깊숙이 침투하면서 비자발적 저장이 자발적 저장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일상이 공개 저장되고 스마트폰은 쩨2의 두뇌가 되었다. 클라우드 컴퓨팅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빠른 속도로 심화됐다. ‘모든 것을 기억하라’를 모토로 하는 에버노트가 대표적이다.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용 디지털 도구를 이용한 이미지 촬영과 음성녹음, 텍스트 작성를 통해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도록 진화되면서 우리의 기억은 손쉽게 데이터로 전환되어 저장된다. 기억들이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컴퓨팅 서버에 위탁되는 것이다. 에버노트가 영향받은 연구가 <마이라이프비츠> 프로젝트이다.

카메라와 휴대용 디지털 도구를 통해 일상의 모든 부분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검색하는 라이프로깅은 인간의 사유와 기억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보다 더 완벽하게 ‘나’를 저장하고 재생, 복원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시뮬레이션이다. 앤드류 달 리Andrew Darley가 사이버시대의 극사실주의라고 말햇던,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스펙터클로서의 시뮬레이션이며, ‘나’의 스펙터클이다. 그러나 라이프로깅은 복원할 수는 있지만 기억하지는 못한다. 시뮬레이션으로서의 기억인 데이터는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과거로 불러들이는 대신 과거의 데이터를 현제로 가져와 복원한다. 사유하고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사유하고 기억‘했던’ 나를 재생한다.

기억이 현재를 과거로 이끈다면 저장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복원한다.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폴>은 마치 기억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요정이 깃든 인형 찌찌가 요술봉을 때리면 벽이나 바닥에 검은 공백이 생긴다. 그 맨홀 같은 공간을 통과하면 ‘이상한 나라’로 가는 것이다. 시리즈의 말미에 힘을 회복한 마왕은 이상한 나라를 벗어나 인간들이 사는 현실세계로 온다. 마치 저장된 과거가 현재로 날아와 복원되듯이.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만은 지울 수 없다. 완벽하고 정확한 제2의 기억을 얻기 위해 인간이 지불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