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치렀던 김장 전쟁

때아닌 겨울 장마로 비 오는 날들이 많더니 오늘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웬걸,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올 들어 서울에서 처음으로 내리는 큰 눈을 오전 내내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러시아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실론 차에 설탕이나 꿀을 듬뿍 넣고 레몬을 띄워 마시고 살았던 러시아 겨울은 늘 이런 날씨였다.

필자와 두 딸은 러시아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눈을 보았던가! 정말 10월 초순부터 매일 쏟아지는 눈이 어깨를 넘어설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회색빛 날씨에 쉬지 않고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 러시아에서 매해 겪었던 김장 전쟁이 생각난다. 한국은 11월 중순쯤 이면 김장철에 들어가고 재래시장이나 마트에 수북이 쌓이는 싱싱한 배추와 무 등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 싱싱함에 입맛을 다시고 곧 맛있는 김장을 하게 된다. 살아 펄떡이는 생새우와 젓갈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필자도 지난 주 초에 김장을 했다. 김장을 하고 그 이튿날 미세하게나마 첫눈이 내렸다. 그러자 딸들이 손뼉을 치며 깔깔거린다.


“어머니 여전하네요. 러시아에서도 김장하고 나면 꼭 다음날 눈이 펑펑 내려서 기분이 좋았는데…. 마치 큰 부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러시아에 살면서 김장하는 일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했다. 1992년부터 러시아에서 17년 동안 매년 김장을 했는데 첫해에 산 배추(그것도 아는 고려인이 얼마나 힘들게 구해다 주었는지)는 한국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크기와 길이를 가지고 억새같이 뻣뻣했다. 보기에도 맛대가리가 없게 생겼는데 그래도 배추라니 얼마나 반갑던지, 김치를 먹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것도 감지덕지했다.

필자는 손바닥보다 더 두터운 배추를 8등분 해서 목욕탕의 욕조에 절였는데 억센 숨을 죽이려고 왕소금을 거의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절여 씻어낸 배추에 한국에서 가져간 고춧가루와 젓갈을 투하하고 김장을 했다. 그래도 그나마 그런 배추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필시 양배추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이면 배추로 담근 김치와 고기만 있으면 겨울을 나는데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 배추도 감사하고 다행으로 알았다.


그 후 배추는 해마다 진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배추씨를 공수받아 남쪽지방에서 대대적으로 재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을이면 그들은 배추를 모스크바로 가지고 와 판매했다.

필자는 70킬로 정도의 배추를 사서 김장을 했는데 부엌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를 하나씩 손질해서 욕조에 절이는 작업을 하는 것만도 이틀이 걸렸다. 김치 속을 하는 것도 큰 전쟁이었다. 나중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액젓 대신 러시아에서 산 “낄까”라는 멸치과로 한국의 멸치보다 훨씬 컸다.

필자는 시장에서 이걸 발견하고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젓갈은 이걸로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낄가를 몽땅 사서 소금으로 절여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낄까”는 크고 살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아주 맛있는 멸치 젓갈로 변하는 것을 보고 김장 때 젓갈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사설 중앙시장에서 쪽파와 갓도 구입을 하고 사과, 배, 그리고 생새우 대신 냉동 새우를 사서 잘게 다져 김치 속을 만들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바람도 심하게 부는 날은 재료를 사러 다니는 일도 온몸의 진을 다 뺐다. 마늘과 생강은 가을부터 눈에 보이는대로 대량으로 구입해서 준비하고 있다가 김장철에 마늘 까고 생강을 다지고 나면 어깨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두 딸들이 커가면서 마늘과 생강 다지는 일을 해결해 주어 필자에게 힘을 보탰는데 누가 하든 그 작업은 생각하기도 싫은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러시아는 겨울이 6개월 이상 되기 때문에 김장은 필수적이었다. 필자는 70킬로 정도의 김장을 하지만 다른 한국인들은 500킬로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 200킬로는 보통으로 알았다. 이러니 겨울이 시작되면 러시아에서 김장하는 일은 제일 큰 사건이었다. 이렇게 힘들고 고된 김장 전쟁을 며칠간 치르고 나면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쑤시고 아팠는데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 미묘해서 몸이 죽어나가게 김장을 하고 난 뒤, 그 다음날에 눈이 펑펑 쏟아지면 세상 것이 다 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 겨울을 지내는 동안 김치는 큰 재산으로 김치만 많아도 마음이 든든했고 러시아에 생선과 고기는 많지만 야채가 많지 않기 때문에 김장은 필수적이었다. 김장 김치는 베란다에서 얼고 녹으며 다음 해 늦은 봄까지 먹었다.

필자와 두 딸이 러시아에 오래 살면서 가장 힘든 노동의 시간을 가졌던 것은 초겨울에 김장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동의 대가(代價)는 확실히 있었다. 눈에 쌓인 그 긴 겨울을 김치 하나로도 풍성하고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