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금산 보리암, 그리고 쪽빛바다

보리암 해수관음보살상과 금산/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어느 해 백두산에 오르던 길에 가이드가 말했다. “정상에 올라가도 천지를 제대로 볼 기회가 30%도 안 되거든요. 그러니 기도 열심히 하세요.” 그 말은 가감 없는 사실이다. 애써 올라가도 기상 조건이 나쁘면 비구름이나 보다 내려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갈 때도 ‘3대가 공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다행히 나는 백두산 천지도 천왕봉 일출도 볼 수 있었다.


이 두 곳 외에도, 품을 열어주는데 인색한 곳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남해 금산(南海 錦山). 금산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불릴 만큼 자태가 빼어난 산이다. 각종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푸른 바다와의 조화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고의 풍경을 연출한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고 한다. 신라 원효대사가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세웠다는데서 유래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새 나라의 문이 열리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기도 덕인지 새 나라가 열렸지만 어찌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까. 대신에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또 동남동녀 500명을 거느리고 불로초를 찾으러 떠난 진시황의 시종 서복이 금산까지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남해에 갈 때마다 금산의 보리암을 찾는다. 보리암은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꼽힌다. 흔한 말로 ‘기도발이 잘 듣는 곳’이라고 해서 많은 이들이 찾는 절이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이 바로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도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보광사다. 가파른 산허리를 빌려 쓰는 바람에 터가 넓지는 않지만 보광전, 간성각,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절묘하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내가 금산을 여러 번 찾는 까닭은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매력 때문이다. 이곳 바다는 내가 본 바다 중에 가장 아름답다. 쪽빛 비단처럼 펼쳐진 물결 위에 누군가 일부러 장식한 보석마냥, 점 점 점 떠 있는 섬들. 바다가 반달처럼 휘어 도는 곳을 앵강만이라고 부른다. 누구는 항아리가 누워있는 것 같아서 '앵강'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구슬픈 파도소리가 앵무새의 노래 같아서 앵무새 ‘앵(鸚) 자’를 썼다고도 한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문제는 아무 때나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역시 3대쯤 덕을 쌓아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나는 세 번째 찾아가서야 완전히 열린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갔을 때까지는 날이 흐리거나 해무가 짙어서 앵강 바다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리암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세 번째 보리암을 찾아가던 날은 출발부터 예감이 좋았다. 하늘은 빗질을 해놓은 것처럼 푸르게 빛나고 대기는 미세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해수관음보살상과 삼층석탑을 지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돌난간 앞에 섰을 때, 아! 거기 그렇게 보고 싶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산이 거침없이 달려가다 쪽빛 바다와 만나고 그 사이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는…. 하늘과 바다는 서로의 색깔을 자꾸 베끼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가슴이 탁 트인다’든가 ‘황홀하다’는 말조차 가벼워 보이기 마련이다. 내 가난한 언어를 덮어줄 시 한 수를 길어 올릴 뿐이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전문

‘그 여자’가 누구면 어떠랴. 어머니여도 좋고 사랑했던 여자여도 좋고 돌이킬 수 없는 내 젊은 날의 시간이어도 좋았다. 다만 품을 내주는 산과 절과 바다가 있고, 내 안에서 시가 종소리처럼 울리고, 그 순간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근원을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가슴 벅차게 차오르던 희열이 그 증거였다. 대처에서 스스로 지은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