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머금고 환상에 사로잡힌 그녀

상영 내내 관통하는 색감은 잿빛이다. 행복한 세 식구가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그 순간에도 우울하고 슬픈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빛의 중심엔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파니아(나탈리 포트만)가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지성을 겸비한 이스라엘 여성 파니아는 남편 아리에, 아들 아모스와 행복한 삶을 꾸려나간다. 1945년 전쟁이 끝나는가 싶더니, 이내 예루살렘에는 작은 전쟁들로 가난과 고통, 슬픔과 고독이 스며든다.


어릴 때 자신이 상상하던 세계와 너무 다른 곳에서 파니아는 잠시 환상 속에 빠지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으려 하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 속의 예루살렘은 그녀에게 깊은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현실에서 그가 기대는 유일한 낭만은 아들 아모스다. 자신이 상상하는 스토리를 아들과 나누면서 현실을 환상처럼 포장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면증으로 파니아는 현실과 점점 멀어지고, 결국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

영화 ‘레옹’으로 단숨에 스타로 떠오른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는 아모스 오즈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 속 파니아는 어린 시절 유복한 집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 찬란한 기억을 안고 전쟁과 더불어 사는 그녀의 삶은 애완견이 들개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꿈으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나는 한 여인의 혼란과 불안이 위로받고 구제받을 수 있을까. 영화는 이미 할아버지가 된 아모스의 내러티브로 이렇게 얘기한다. “서로에게 조금만 비열해도 지옥을 오가고, 서로에게 조금만 친절해도 천국을 오를지니.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착각으로 살 바에야, 아예 모르고 사는 게 낫다.”


영화는 비교적 캐릭터 자체에 비중을 높였다. 과잉 감정을 분출하지 않아도 그 깊이를 이해시키는 파니아의 연기, 침묵 속 작은 말과 행동 하나로 의미를 또렷이 전달하는 아모스의 연기는 굴곡 없는 스토리에서도 탁월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다만, 영화에선 파니아가 고통과 슬픔으로 내몰린 배경의 흔적이 쉽게 읽히지 않고 가난과 전쟁만으로 개인의 내면 세계가 고통받는다는 설정에선 설득력이 떨어진다. 소설은 이에 비해 좀 더 큰 틀과 깊이로 개인과 역사를 총체적으로 아우른다.

감정에 관해 침묵할 것으로 강요받았던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어머니(파이니) 얘기를 하지 않는 어둠의 시간을 통해 단절의 역사를 상징하는 의미 등이 간과된 것은 아쉽다. 9월 1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