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숲속을 걷는 행복

죽령옛길의 초입. 오솔길이 금세 숲으로 꼬리를 감춘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남들이 바다로 강으로 갈 때 나는 숲으로 간다. 숲에 부는 한 줄기 바람을 품에 안는 순간만큼 큰 행복이 있을까. ‘진저리가 쳐진다’는 말은, 비할 곳 없이 좋을 때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숲으로 찾아가는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충북 단양에서 경북 풍기로 넘어가는 길. 소백산 자락을 타고 굽이굽이 달리는 길은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준비해 놓았다. 소나기 한줄기로도 나무들은 잎을 흔들어 환희를 노래한다. 에어컨을 끄고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숲의 향기를 가슴 가득 들인다. 나는 지금 죽령 옛길을 찾아가고 있다.

소백산역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먼저 반기는 것은 물소리다. 그리고 장단이라도 맞추듯 뒤를 따르는 새소리. 천천히 걸어 소백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한여름의 산은 물감통을 쏟기라도 한 듯 푸르고 또 푸르다. 길은 금세 숲 속으로 몸을 누인다. 모퉁이를 도니 눈앞이 환해진다. 느닷없이 나타난 사과 과수원 덕이다. 와! 산속에 이렇게 넓은 과수원이 있다니. 한여름의 햇볕과 바람과 시간을 품은 사과들이 한껏 몸피를 키우고 있다. 시간은 더위 속에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사과를 키우며 잰걸음으로 흐르고 있었다.

걷다 보니 조그만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서 쌓은 것일 게다. 아니면 나그네가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하나둘 던진 게 쌓였을지도.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호환(虎患)을 피하게 해달라고 도적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댈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다.

죽령 옛길, 지금은 소로로 변해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곳곳에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 길이었다.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이 길이 열린 건 신라 때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년)때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근래까지도 이 길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물론 온갖 장사꾼들이 넘나들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길손들을 위한 주막과 마방이 들어서서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이 길 역시 시간을 비껴가지 못했다.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더니, 1960년대에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숲으로 되돌아갔다.

죽령옛길이 끝나는 지점에 죽령루가 서 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길 주변에는 다래넝쿨과 온갖 잡목이 얽히고설켜 마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 야생화들도 등불을 켜들고 길을 밝힌다. 길을 걷는 재미 중 하나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길은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조금 더 올라가니 느닷없이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활엽수 숲을 걷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침엽수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여기까지는 숨차지 않을 정도로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낙엽송이 뜸해질 무렵부터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숨이 턱에 찰 무렵 저만치 우뚝 선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도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죽령루(竹嶺樓). 헐떡거리며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거친 숨을 가라앉힌 뒤 시간을 본다. 안내에는 총 2.5km에 40~50분이 걸린다고 돼 있었지만, 여기저기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죽령루에 올라가 풍기 쪽을 굽어본다. 세상이 다시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출발지로 돌아가면 5km 남짓 걷는 셈이다.

내려가는 길에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주막 터를 발견한다. 여기저기에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고 구들장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흔적도 보인다. 하지만 주막 특유의 떠들썩하던 광경은 상상으로만 그려볼 뿐이다. 넝쿨손들이 땅 위에 누우려는 담장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법. 비껴드는 햇살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가득 찬 느낌이다. 나는 지금 1800년의 시간 속을 다녀온 것이다. 더위가 점령하고 있을 사람 사는 세상이 아득하게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