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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세계

[1회 과학문학공모전 단편소설] 가작 '네번째 세계' <끝> 망향

제1회 과학문학공모전 수상작 머니투데이 이영인 (필명) |입력 : 2017.01.0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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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디자이너 임종철
삽화=디자이너 임종철

AT. 62

시아의 번역 작업은 순조롭다.

선원들과 토론을 했다. 만장일치였다.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고 싶어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나보다.

곤살로에게 돌아가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문명을 재건하고 싶단다. 계획이 아주 거창했다.
현재의 지구에는 연료라 할 만한 것이 없단다. 석유, 석탄 이런 것들은 전부 동식물의 시체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제대로 된 생물이 없으니 그런 것들은 없다. 끝내주게 청정한 세계겠군.
또 재미있는 것이, 이 시기의 생물들은 복합 단백질 구조체, 그러니까 복합 아미노산이 없단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인간은 수백만년간 자연선택을 통해 복합 아미노산을 ‘맛있다고’ 느꼈는데, 이 시기의 생물은 뭘 먹어도 당최 끝내주게 맛이 없을 거라는 것이다. 광부짓을 하면서 그나마 즐거운 점이 먹거리가 좋다는 점이었는데 그마저도 없단 소리다.
하지만 곤살로는 이러한 구질구질한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시아를 동력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참으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 신나서 이야기한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그런 일을 겪어놓고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좀 어이가 없기도 했고.

그래도 썩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 확실히 저것이 무한동력이고 어떻게든 응용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에너지 문제는 없겠지. 따져보면 우리는 인류 최대의 고민을 한 가지 해결한 셈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선대에서 일궈놓은 수많은 자료들이 남아있다. 동식물은 없다 하더라도 광물은 아마 있을 것이고, 우리 조상의 유물과 '첫 번째 지구인'의 유물을 이용하면 제법 빠르게 문명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뿐인가. 우리는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다. 무언가 조치해놓고 시간을 뛰어넘어서 결과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도 될 것이고.

우리가 성공적으로 도착해서 어찌어찌 문명을 재건하게 된다면 네 번째 문명이 되는 것인가? 지난 세 번의 문명과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사실 두 번째 문명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어보이지만, 여하튼 저 세 문명과는 시간대부터가 20억년 가까이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첫 번째 지구인들이 왜 시아를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유추한다.

1. 최초 개발자들이 무언가 계산을 잘못하여 이 사단이 났다.
2. 계산 자체는 개발자들의 계획대로였으나 시아가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가동되던 끝에 오작동이 일어났다.
3. 지금의 상태가 최초 개발자들이 설계한 것이고, 의도대로 작동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3번을 믿고 싶다. 첫 번째 지구인들이 왜 시아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기술력을 가진 자들이 ‘살덩이’가 만들어낼 문제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리셋 그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상의 생물체를 리셋하기 위해 시아를 만들어 과거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논의하는 내용들이 차원이 다른 이야기들이다. 이래도 될까 싶은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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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의 자료들을 대충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번역이 매끄럽지도 않고 사전처럼 설명이 잘 되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것은 엔트로피가 감소되는 상태, 다시 말해 반엔트로피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정말로 그러한 상태에 대한 설명이 존재했다. 다만 상상도 하지 않던 개념이니만큼 우리말로 대체되지 않는 용어들이 많았다. 곤살로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을 물리학 이론으로 풀어나가면 정말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자신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라 이것을 번역하는 것도, 이론을 연구하는 것도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설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추론이 맞다는 의미가 된다. 맙소사, 궁여지책으로 물리학의 근간을 무시한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앞뒤가 맞는다면, 반균질화 가설을 조금은 신뢰해도 될 것 같다. 물론 그런 외계가 있는지, 정말로 에너지가 무한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가닥은 제대로 잡은 것 같다.
그나저나, 정말로 열역학 2법칙이 부정되는 것을 보게 되다니... 아직도 엔트로피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우리가 살던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기묘한 모양이다.

정말로 우주를 '리셋'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주에 그 정도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힘’이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반균질화 가설이 사실이라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대체 우주의 수수께끼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반균질화, 다시 말해 반엔트로피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자원 문제, 에너지나 시간을 사용하는 데 혁신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에너지를 재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고, 시간을 리셋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첫 번째 지구인'들은 어디까지 알았던 것일까? 설마 지금 이 모든 사태를 다른 차원에서 지켜보고 있는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 그들이 멸망해 버렸다면, 무한동력과 시간이동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우주상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뭐, 일단 지금으로서는 더 알 수 없는 내용이니 목숨을 부지하고 생각하자. 아직 우리의 상태조차 완벽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래 과학에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수수께끼는 남아있을 테고,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낫기를 희망할 뿐이다.
반균질화 가설을 통해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간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다. 설령 이 가설에서 심각한 결함이 발생하여 폐기된다 하더라도, 진실과 어떤 상관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당면했던 수수께끼들을 설명해내고 시아의 번역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것으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반균질화 가설이 사실로 판명나건 그렇지 않건, 확실해지는 순간에는 여지껏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발전이 아니면 뭐겠는가.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이 사건으로 잃은 것들은 나를 진실로 괴롭게 만든다. 그러나 정말로 삶에 미련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악몽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물리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무한동력을 보았다. 시공간 이동도, 시공간을 차단한다는 개념도 보았다.
기존의 개념으로는 하나같이 신과 같은 일들이다. 우리는 인류가 염원하던 진실에 누구보다 더 다가가게 되었고, 기존의 문명에서 상상도 못하던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율할만한 가능성을 목도한 후에 가슴이 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잃은 것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을 기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난 이야기, 내가 잃은 것들을 되찾는 이야기도 계속해서 한구석에 맴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여지껏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것들이 떡하니 튀어나왔으니 그런 희망을 품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이 된다.





AT. 64

블랙필드 밖을 모니터링하는 기능을 발견했다. 시공간의 벽을 대체 어떻게 통과해서 정보를 수집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여하튼 우리의 추측대로 밖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살덩이임이 분명하다.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지다니, 이건 또 이것대로 소름이 끼친다.

꽤나 먼 거리까지 관측했던 것 같지만 지금 이 별을 구름처럼 둘러싸고 있는 살덩이가 너무 두꺼워 그 밖까지 관측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아마 급속도로 찢어져서 우주 공간에 퍼지면서 죽어나가고 있겠지. 일반적인 우주공간이라면 금세 먼지가 되 갈 것이다.
아아, 우주에 우리의 살점이 널리 퍼져가는구나. 어디까지 퍼졌을지. 얼마나 퍼졌을지. 지구에는 영향을 얼마나 주게 될런지.

말도 안될것 같던 가설이 맞아떨어져가니, 쾌감이 일기도 하지만 우리의 생존과 역사에 관계된 것이라 순순히 기뻐하기는 어렵다.
이제 정말로 우리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된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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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가 공간이동이 가능함을 확인하였다. 작동법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고, 변수도 크게 없어 보인다. 살덩이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별 문제는 없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갈 수 있다. 지구로 갈 수 있다. 살 수 있는 것이다!
모두들 얼싸안고 기뻐했다. 곤살로와 스타니슬라프는 펑펑 울었다. 나중에는 우리 모두 울었다.

지구로의 귀환을 준비하기로 했다.
심정같아서는 당장에 가고싶지만, 2~4주 정도 준비 시간을 가지고 싶다. 선원들은 당장에라도 떠나가고 싶어했지만 가능한 한 많은 준비를 하고 싶다.
시아의 데이터 해석은 계속할 수록 좋을 것이고, 원시 지구의 상태와 생물의 진화, 그리고 농경에 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문제거리가 아주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기에는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당장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아예 미래로 이동해서 새 살림을 차리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일단 귀환부터 성공하고, 그리고 지구의 상태를 보고 논의하기로 했다. 자원 문제나 기후같은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식량, 물, 공기 이 세가지는 우리가 알던 지구와는 큰 차이가 나기에 준비를 하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남아있다. 열역학 법칙이 어떻게 수정될 것인지, 시아의 구체적인 구동원리라던지, '첫 번째 지구인'이 왜 이런 기계를 만들었는지, 시아는 왜 40억km나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는지, 시아가 작동된 것이 우리의 실수인지 아닌지 등등. 풀어야 할 숙제도 아주 많다. 허나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우주에는 비밀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일단은 모든 것을 미뤄두고 지구 귀환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햇살이 필요하고, 환기가, 산책이 필요하며, 좀 더 신선한 식사가, 동기부여가, 위안이, 그리고 절망이 우리가 아는 온 우주를 뒤덮더라도 그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미래를 개척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나머지 문제들은 시간을 들여 해결해나가야 하겠지.

그리고 결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전 세계의 지구인들은 어떤 실수를 한 것일수도 있다. 이 사단을 거치고 나니, 죽음보다 실패가 두렵다.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이다.
우리는 시아가 가진 능력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해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도구가 너무나, 우리의 상상과 가치관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것은 극도로 신중해야 할 것이다.
지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로 가게 되어 뭔가를 만들면 거기에 우리의 추억을 담아 이름을 짓기로 했다. 나는 두 아이들과 아내의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의 절친했던 친구들과, 회사의 지긋지긋하던 동료들, 싫어서 치를 떨던 놈들까지, 더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전부 이름을 붙여야지.
그러면 조금은 과거와 연결된 세계가 될까.





AT. 70

드디어 내일, 지구로 귀환하기로 했다. 시아의 공간이동 조작법은 지구로 돌아가는 마지막 난제치고는 너무나 쉬웠다. 하기사, 같은 별 출신이니 생각하는게 비슷한 것일지도. 몇일 전부터 완전히 숙지할 수 있었고, 수 차례 테스트를 했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오늘 아침에는 이미 함선의 잔해에서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700km를 이동해 별의 반대편에 있지만, 체감상으로는 한순간에 움직였다. 정말 순간이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참고로 필드 밖을 관측했는데 밖은 난리도 아닌 것 같다. 이 곳 역시 살덩이들로 가득 차 있는데, 살덩이들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의 데브리가 발생했고, 이리저리 뭉치면서 중력에 의해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발생하고 있는 듯 하다. 저것들 중 상당수는 한데 뭉쳐서 천체가 될 수도 있다. 세상에, 살덩이로 이루어진 천체라니. 그 천체가 광물화되어 태양 주변을 돌아다닌다면 영 떨떠름하겠지. 지구로 돌아가면 천체 지도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예정보다 조금 빠르긴 하다. 원래 1~2주정도 더 상태를 보려 했으나, 공간이동이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사실을 알자 선원들의 의견이 거세졌다. 90일 가까이 이곳에 갇혀 있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지. 당연히 나도 떠나고 싶고.
여러 모로 검토해 보았으나 문제될 것이 없기에 내일로 결정했다.

어마어마한 거리이지만 시공간 이동이기 때문에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이동 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곤살로는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이틀에서 사흘 정도로 잡고 있다. 여기까지 올 때는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마음같아선 한 번에 이동하고 싶고 그러면 당장에 지구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동중에 재수없게 근처 천체의 핵이라도 박살내게 된다면(천체와 부딪히면 블랙 필드가 박살나는 것이 아니라 천체가 박살난다. 기가 막혀서...) 어떤 후폭풍이 올지 두렵기 때문이다. 하필 달을 박살내기라도 하면 정말 커다란 문제가 될 테니까. 그래서 짧은 이동을 수 차례 하기로 했다.
그 밖에 우리가 위험한 상황은 블랙필드가 막아줄 것이다.
40억km이지만,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산재한 문제들은 가서 해결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살덩이같은 제한요소가 있지만 알고 있다면 통제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가서 연구를 하다가 실패하면 되돌아가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 셈이다!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 탈출선 안에 가능한 모든 장비를 넣어두었다. 고장나고 부서진 것들이라도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쓴 데이터를 블랙박스에 백업해둔다. 혹시 아는가, 우리가 이동중에 몰살당하기라도 한다면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이 필드가 망가질 정도라면 블랙박스도 박살날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얘기니까. 블랙박스에 동봉된 자료들은 우리가 발견한 것, 시아에 대한 데이터를 한계까지 쑤셔넣은 것이다.
시공간을 넘어서, 당신이 누구이던, 어디에서 발견했던 우주공간에서 이것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실패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당신에게 시아 같은 물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 또 만약에 주변에서 시아같은 물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신중해야만 할 것이다.

일기에 기록된 일자를 바꾸었다. 선원들이 멋대로 메인 컴퓨터부터 개조해 버렸다. 기존의 일자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나.
붕괴된 날을 기점으로 AT라는 일자개념을 신설하였다. 딱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부분이지만 그들의 사기를 꺾고 싶지는 않아서 허용했다.
선원들은 새로운 출발이라는 의미를 좋아했다. 희망이 있어 보이니까.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이것을 새로운 시작이라 봐야 한다. 네 번째 세계의 시작이라 해도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곳에 갇혀 있던 날들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앞으로가 딱히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과 같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까지 몰려 그야말로 미치기 직전까지 가던 시절만큼 어렵지는 않겠지.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가장 힘든 시기도 지냈다. 이제 우리가 알던 시간대는 과거 속의 미래가 되었다.

그래, 이 절망의 별을, 암흑의 시대를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싶다.
그래도 되겠지.

여기까지는 성공했다. 과거세계의 유산으로 인한 일차적인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과거로 되돌아왔지만, 인과율은 변함없이 전진하였고, 우리 역시 지금까지 한 방향으로 전진해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조금 더 전진해볼 것이다.
이곳에서 나왔던 개념들, 논의들, 현상들은 솔직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정말 압도적인 개념들이었던지라 설혹 신을 대면하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이 별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음 날이면 모두 뒤집힐지도 모르지. 앞으로 또 무엇을 보게 될지 두렵다.
그러나 우리가 전진하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를 것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일 것이다. 좌절을 맛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안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네 번째 세계에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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