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유럽연합에도 검문은 있다

북유럽의 고속도로. 특별한 국경표시도 없이 저런 길이 계속 된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오로라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서 벨기에~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북단까지 육로로 올라가는 긴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국경 표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맨 처음 프랑스에서 벨기에로 넘어갈 때부터 그랬다. 분명 나라와 나라 사이를 지나는데 특별한 표시가 없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국경을 지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달릴 뻔 했다.


명색이 국경 아닌가. 철조망이나 담장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경계를 나타내는 구조물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우리나라는 도계(道界)를 지날 때만 해도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써놓고 생색을 내는데. 입국심사는커녕 검문소 하나 없었다.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들은 유럽연합(EU)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 있구나.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도 오가지 못한지 오랜데….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보통 덴마크와 함께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아이슬란드 등 5개국을 합쳐서 북유럽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에서 하룻밤 묵어갈 계획이었지만, 스웨덴 말뫼에 거주하는 교포 한 분이 꼭 들러 가라고 연락을 하는 바람에 좀 더 올라가기로 했다. 저녁 무렵 덴마크를 벗어나 스웨덴 쪽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돌발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국경을 넘는 순간이 미뤄지고 말았다.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가는 국경은 외레순 해협 위에 놓인 외레순 다리의 중간에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 국경 역시 검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넘어가려고 하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삼엄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캠핑카를 세우더니 4명이 둘러싸고 검문을 시작했다. 우선 한 명이 탑승자 전원의 여권을 보여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운전을 맡은 프랑스인 브노아의 여권은 수월하게 넘어가더니 내 여권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권 사진은 검은 머리인데 왜 너는 흰 머리야?”


이 경찰관 눈이 어두운 건가? 여권 받은 날짜를 좀 봐라. 9년이나 지났잖아. 머리가 세는 게 당연하지. 어찌 그것뿐일까. 여행 내내 수염을 못 깎았으니 얼굴도 영 딴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게 어디 나뿐이랴. 함께 출발한 멤버 모두 수염도 못 깎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바람에 난민처럼 추레한 몰골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찰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노르웨이 눈길 위에서 노숙을 하다가 만난 오로라./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잠시 뒤 여자경찰 하나가 군화를 신은 채 캠핑카에 오르더니 침대니 화장실이니 이 잡듯 뒤졌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누군가 숨어있을 거 같다는 의심과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숨은 사람이 있을 턱이 있나. 결국 빈손으로 내려가 여권을 가지고 초소로 가더니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둠은 짙어가고 갈 길은 멀고, 스웨덴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니 조바심이 일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아까 그 여경이 돌아오더니 여권을 돌려줬다. 너희들이 범죄 혐의자처럼 보여서 조사를 좀 철저하게 했다느니,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느니, 설명 같은 건 한 마디도 없었다. 당연한 공무집행을 한 거니, 여권을 돌려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고 가던 길 가라는 표정이었다. 하긴 뭐 그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긴 했다. 안 보내주면 다리 위에서 밤을 지내는 수밖에 더 있나. 스스로 달래며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에 들어보니 급증하고 있는 시리아 난민 때문에 검문이 강화됐다는 것이었다. 외레순 다리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가 곤욕을 치른 셈이었다. 스웨덴은 이민자라고 부르는 난민에 관대한 편이지만, 대책 없이 밀려드는 시리아 난민에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난민. 집도 고향도 나라도 잃고 남의 땅을 떠도는 사람들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그들이 떠도는 게 어디 그들의 잘못인가?
국경 없는 유럽에서 겪은 검문은 뜻밖의 경험이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은 역시 ‘변수’라는 작가가 쓰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