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 앞에서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의 석비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행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욕심을 지혜롭게 내려놓는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더 많은 것을 보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결국 그 무엇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보고 느끼는 것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도시 여행은 더욱 그렇다.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짧은 일정 동안에 무엇을 보고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콘셉트를 하나 정하기로 했다. 베를린이 가장 확실하게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전쟁의 비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였던 독일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콘셉트를 결정하고 나면 루트를 정하는 것이 쉬워진다.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Holocaust Denkmal Berlin)’이었다. ‘유럽의 유대인 학살 추모관’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곳에는 다양한 높이의 구조물이 끝없이 나열돼 있다.

이 구조물은 독일인이 과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잔혹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프로젝트로 만들어졌다. 어두운 색의 2711개 석비(石碑)가 관람객의 시선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 폭과 길이는 같지만 높이는 각기 다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폭과 같은 95cm로 한 사람이 걸어갈 만한 공간을 비워놓았다. 그 미로 같은 공간은 끊길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당시 유대인들의 심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어둠 속에 갇혀, 앞날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유대인. 그들에게 끝없는 미로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석비는 궁극적으로 침묵과 아픔, 화해, 미래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용서와 화해, 그리고 미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죄가 전제돼야 한다.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은 절대 지워질 수 없는 범죄다.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게도 돌이켜보고 싶지 않는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범죄는 지나간 시간이고 그 이후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미래를 좌우한다. 범죄자의 후손들이 사죄를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교훈을 남기기 위해 이러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역사의 교훈을 잊은 민족에게는 다가오는 미래 역시 암울할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추모관 인포메이션 센터에 전시된 자료사진. 나치가 유태인에게 저지른 폭력을 한눈에 볼 수 있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조성했다는 구조물 앞에서 독일을 생각하고 일본을 생각했다. 유태인을 생각하고 우리 민족을 생각했다. 독일이 그렇게 과거를 인정하고 사죄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일본은 오로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전쟁위안부라는 범죄행위를 부정하고 돈 몇 푼으로 덮으려고 했다. 교과서를 왜곡해서 후세대의 역사 인식을 바꾸려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비교하는 것조차 싫지만, 홀로코스트 추모관 앞에 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상념들을 내려놓고 석비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석비와 석비 사이의 틈으로 숱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했다. 저들 눈에는 이쪽에 있는 내가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겠지. 어찌 석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모든 존재는 그렇게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져간다. 사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순간 자신과 타인의 고통이 시작된다.

석비들 사이를 지나 지하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는 각종 자료를 통해, 유대인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희생자들의 사진이나 편지‧일기 등의 기록물 앞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실감했다. 딸이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아빠, 마지막 인사를 드려요….” 단 한 줄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의 기록이 필요한 것이다.

여행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 무거운 마음 역시 여행이 주는 가르침이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 앞에서 오랫동안 묵념을 하며 전쟁의 비극과 평화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는 흘려버리면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지만 가슴에 얹으면 교훈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번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