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죽은 척, 짐승의 시간에 도착했다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미라 시인(1952~ )은 다섯 번째 시집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에서 끊임없이 뭍으로 밀러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만남과 헤어짐, 죽음에 천착하고 있다. 바다와 뭍이 만나는 해안선은 시작인 동시에 끝인 공간이다.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인 해안선은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킨다.


어머니를 낳을 수 없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시는
떡갈나무 그늘을 옮겨다 주시는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고아처럼 서럽습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뻔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비겁합니다
- ‘뫼비우스의 띠’ 전문

나(딸)와 어머니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시 ‘뫼비우스의 띠’는 시집 전체 분위기를 한눈에 조명해준다. 구체적인 사연이 드러나 있지 않아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나는 어머니를 보내드렸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어머니를 보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머니와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딸인 나’와 ‘딸이면서 어머니인 나’를 상징한다. ‘고아처럼’에서 알 수 있듯, 미성숙한 존재인 나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복잡한 가족사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다는 것은 나를 닮은 딸을 낳으려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고아처럼 서러웠던 ‘나 자신’에 더 가깝다. 어머니의 죽음이 어머니에게 좀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됐을지 모르지만 ‘비겁하다’ 느끼는 내 마음까지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
꽃이었다가 물이었다가 타오르거나 가라앉는
모서리들의 힘으로 간혹 눈부시다

빈틈없이 맞물린 도형들 사이를 비집어
붉은 모란 한 송이를 꽂는다
향기 없는 꽃인 걸 잠깐씩 잊으며
노랑 옆에 초록을 두는 진부한 속임수
스물이, 마흔이, 노랑빨강파랑이,

저 눈부신 것들이 꾸려가는 감옥의 나날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반복이 문득 끊기는 귀퉁이
모란은 자라서 가시나무가 되고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갇혔다는 걸 알 때쯤
이 평면도의 출입구는 봉쇄될 것이다

도대체! 조각보 한 장에 다 들어가는 일생이라니
- ‘조각보 연대기’ 전문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나를 ‘마음의 감옥’에 가둔다. 내 안에서 나는 “꽃이었다가 물이었다가 타오르거나 가라앉는” 안정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나를 밀쳐내는 나’와 ‘나를 끌어안는 나’는 하나의 선, 즉 면과 면이 만들어내는 모서리에서 만나 안정을 찾을 때 비로소 눈부실 수 있다. 나를 마음의 감옥으로 밀어 넣은 “빈틈없이 맞물린 도형들 사이를 비집어/ 붉은 모란 한 송이를 꽂”음으로써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 애쓰지만 “모란은 자라서 가시나무가 되”고 만다.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갇혔다는 걸 알 때쯤/ 이 평면도의 출입구는 봉쇄될 것”이라고 시인은 단언한다. 감추고 싶은 것은 ‘나의 가족사’와 ‘내 마음’이며, 봉쇄된 평면도의 출입구는 죽음을 암시한다. “조각보 한 장에 다 들어가는 일생”, 즉 한 생애가 조각보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시간의 큰 칼이 나를 토막내면 저렇게 큰 고요가 올 것”(이하 ‘죽은 척하기’)이고, “죽은 척하는 시간이 올 것”이라 예감한다. 죽은 척하다가 “강물보다 먼 고요”를 맞이한다는 것. 시인은 닫는 시 ‘짐승의 시간에 도착했다’에서 온종일 눈물이 흘러 “마음에게 물어보며 산다”고 심경을 고백한다. 하지만 마음(사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몸이 이르시는 대로 복종”하면서 사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사람(이성)의 시간 끝에는 짐승(감성)의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 시간에 이르면 마음을 묶고 있던 생로병사를 몸의 흐름에 맡기겠다는 것. 그리하여 힘들어하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짐승의 시간’에 조우해 삶과 죽음을 견디고, “그뿐이다” 하면서 고요히 살겠다는 것이다.

◇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박미라 지음 종려나무 펴냄. 112쪽/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