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자작나무 숲에서 겨울을 전송한다

눈 내린 자작나무 숲/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이맘때는 정말 갈만한 곳이 없어요. 아직 꽃 피는 봄은 한참 남았고….”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청 끝에 흔히들 하는 말이다. 이 계절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타당한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여행이 단순히 풍경을 보러 가는 행위가 아니라면 계절이 장애요소가 될 수는 없다. 한적한 이 계절이야말로 차분한 걸음으로 내 땅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기 좋은 때다.

아직은 겨울 고유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도 많다. 적극 추천하고 싶은 곳은 강원도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지금은 꽤 많이 알려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고즈넉한 숲이었다. 자작나무 숲은 사계절 모두 특별하다. 봄에는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고 여름에는 바다처럼 풍성하고 풍요롭다. 가을의 단풍 숲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자작나무 숲의 백미를 보려면 겨울에 가야 한다. 특히 이때쯤이 좋다. 남쪽에는 봄소식이 꿈틀거려도 그곳은 한 겨울이다. 눈이 흔한 곳이지만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제의 ‘원대 산림감시초소’를 찾으면 된다. 초소를 지난 뒤 3㎞ 남짓한 임도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길은 비교적 평평하고 부드럽게 이어져서 누구나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다.

천천히 걷다 보면 자작나무들의 자태가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하얀 자작나무와 쌓여있는 눈은 서로를 닮아간다. 같은 색끼리 이뤄지는 오묘한 조화라니. 길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조금 단조롭지만 나무들과 나누는 대화로 심심할 틈이 없다. 가파른 길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서면 거센 바람이 맞이한다. 거대한 숲이 파도처럼 ‘쏴아 쏴아’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가슴 속에 남아있던 번뇌가 한꺼번에 씻겨나간다.


숨이 조금 가빠질 무렵, 하얀 물결이 안길 듯 다가선다. 자작나무숲이다. 아! 그 풍경 앞에서 누군들 감탄사를 아낄 수 있으랴. 수해(樹海)라더니 말 그대로 나무의 바다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청순? 고결? 신비? 뭔가 미흡해 보이는 단어들만 머릿속을 빠르게 스친다. 숲이 하얀 등을 켜 들고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을 반긴다. 늘씬한 자태로 서 있는 나신(裸身)들을 보는 것 같다.

하늘로 힘차게 뻗는 자작나무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는 138ha에 총 5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있다. 원대리에 자작나무를 심은 것은 1993년이었다.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에 따르면 원래는 경제림 단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즉, 다른 나무보다 단단한 재질의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 자작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 일대는 원래 소나무들이 자생하던 천연림이었는데 소나무 재선충이 크게 번지면서 베어내고 자작나무를 심었다. 20년 넘는 시간이 아름다운 숲 중 하나를 만들어내면서, 경제림보다는 관광자원으로 더 각광 받고 있다.

눈에 숲을 다 담았으면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볼 차례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의 장면들이 하나씩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다. 끊임없이 펼쳐진 설원 위의 자작나무들. 순백으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 잠시 서서 주인공들이 감내해야 했던 유배의 시간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겨울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유배라는 단어조차도 그리움이 된다.

숲길을 걷다 보면 동화의 나라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하얀 요정이 튀어나와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지 않다. 이곳에는 자작나무 코스(0.9㎞), 치유 코스(1.5㎞), 탐험 코스(1.1㎞) 등 세 개의 산책코스가 마련돼 있다. 어느 길을 택해도 나무들의 향연이다. 좋은 길로만 다닐 건 없다. 널따랗게 펼쳐진 숲은 발길의 방향을 잡는 법이 없다. 눈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속세는 아득히 멀고 낯선 공간에서 혼자 누리는 행복이 온몸을 감싼다.

자작나무숲을 벗어나면 활엽수 숲이 기다리고 있다. 한쪽에는 소나무 숲도 있다. 나무라고 영역 다툼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숲의 질서와 평화는 견고하다. 아귀다툼에 날 새는 줄 모르는 도시는 저만치 멀고, 하얀 나무와 눈이 지우개가 돼서 잡념들을 쓱쓱 지워나간다. 숲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