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그늘 빈집에도 '아무도 아닌' 사람이 있다"

최영환 작가는 자신이 만난 현저동 주민들의 모습을 목탄으로 흰 벽에 옮겼다. 그들의 모습을 그만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사진=박다해 기자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개발에 밀려난 비둘기의 삶을 노래했다. 비둘기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엔 빈집만이 휑뎅그렁하게 자리를 지킨다. 채 떠나지 못한 몇몇만이 최소한의 온기를 유지하며 살아남고 있다.


자못 황량한 느낌을 주는 빈 집 사이사이에서 예술의 역할을 고민하는 이가 있다. 최영환 작가다. 김광섭이 글로써 떠난 이들의 뒷모습을 기록했다면 최 작가는 영상과 사진, 그림으로 지워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남긴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스페이스오뉴월 이주헌'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 '어딘가에, 아무 곳도 아닌'전은 서대문구 현저동을 기록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다. 현저동은 수익성 부족으로 재개발이 취소돼 10여년 동안 사실상 버려진 동네처럼 방치돼있는 곳이다. 약 50가구 주민들이 남아 삶을 꾸리고 있다.

27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재개발을 둘러싼 거대담론에 묻히기 쉬운 주민들의 일상을 끄집어내고 그들의 일상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최 작가는 2011년부터 5년 넘게 성북동 재개발 이슈에 집중하며 '동네스토리닷컴',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등의 작업을 진행해왔다. "'미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란 물음을 품어 왔다"는 그의 프로젝트에선 도시재개발로 쫓겨나거나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고민과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한 주택의 벽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작품 '현저 1-68번지' /사진=박다해 기자

한옥으로 된 전시관을 들어가면 가장 먼저 머리카락이 까마귀로 묘사된 한 남자의 초상을 마주한다. 남자의 시선은 까마귀 부리의 빵을 좇고 있다.

"눈에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빵을 바라보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아서 많이 공감했어요. 그 공감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죠."

'현저 1-68번지'란 제목을 단 이 작품은 현저동 어느 빈 집의 부엌에서 발견한 벽화에서 따왔다. 그는 이 벽화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모티프를 얻었다고 했다.

재개발조감도를 망점으로 표현한 작품 '머물 수 없는 계획'은 재개발에 대한 허망한 환상을 보여주듯 흰 벽 위에 떠 있다. 가까이에선 흐릿한 점들만 보인다. 뒤로 몇 발짝 물러나야 비로소 조감도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작업을 하며 등기부 등본을 열람했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등본에는 건물이 등재돼있지 않고, 땅의 소유권은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거예요. 원래 이 땅을 소유했던 국가가 민간에 팔았다가 다시 환매하는 과정에서 벌어진거죠. 현저동의 집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결국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건물입니다."

그는 소유권이 조각난 집들의 운명을 보여주듯 건물 사진을 잘라 등기부등본과 함께 전시했다. "재개발이 좋다 나쁘다 가치판단을 하는 건 아니예요. 다만 (개발에 대한) 개인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면의) 거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최영환 작가는 "재개발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게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구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사진=박다해 기자

이번 작업은 내년 하반기까지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그는 다큐멘터리 촬영이나 세미나 등 주민들이 참여해 현저동을 기록하는 다양한 작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주민들을 대상화하는 것을 경계한다"며 "이 동네와 관련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다음 달 11일까지 열린다. 전날(10일) 저녁 7시에는 '현대 도시 그리고 빈 집'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