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통합검색
경제신춘문예 (~12.08)
세상과 잘 사는법, 내가 잘 사는법 - 네이버 법률
시인의 집 관련기사124

[시인의 집] 평생 잊히지 않는 눈동자, 혹은 죽음 같은 용서

<92> 김개미 시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7.03.18 10:26
폰트크기
기사공유
[시인의 집] 평생 잊히지 않는 눈동자, 혹은 죽음 같은 용서
2005년 ‘시와반시’로 등단한 김개미 시인(1971~ )의 두 번째 시집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의 맨 앞에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라는 좀 격한 ‘시인의 말’이 수록돼 있다. 시인의 “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는 과연 누구일까?

이젠 밤이야
모든 것이 잠이 드는 시간

집이 어둠 속으로 침몰해간다
지붕을 넘어갔던 새들도 다시 오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밟은 아이의 맨발이
하얗게 빛난다

저긴 악마의 서식지야
어제 잡아먹은 아이를 오늘 또 잡아먹는 악마가 살아

아이는 미동도 않고 집을 내려다본다
아이의 입에서 몽글몽글
흰구름이 피어난다

어둠은 무섭지 않아
언젠가는 나를 받아줄 거야
여기서 뚝 떨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 올 거야

악마의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와
아이를 찾는다
그녀를 따라나온 불빛이 언덕을 내려간다

더 기다릴 거야
여긴 춥고 외롭지만
아무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천사들을 만날 수 있어

나뭇가지 사이로 옥수수 알갱이 같은 별이 뜬다
황폐한 언덕의 주인인 바람이
아이의 이빨 사이사이를 행차하신다
- ‘나무 위의 아이’ 전문

맨발로 집을 나와 나무 위로 몸을 숨긴 아이는 사위가 어두워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아이가 사는 집은 ‘악마의 서식지’이기 때문. “어제 잡아먹은 아이를 오늘 또 잡아먹는 악마”가 함께 사는 무서운 집에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아이는 나무 위에서 “미동도 않고 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둠은 무섭지 않”다고 호기를 부려보지만 어둠은 여전히 두렵기만 하고, 언젠가 어둠이 “나를 받아줄 거”라는 위안은 오히려 이러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님을 암시한다. 절망한 아이는 “여기서 뚝 떨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날”, 즉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둠 속의 아이는 죽음 또한 악마만큼이나 두렵다. 이때 “악마의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와/ 아이를 찾”아나서지만 아이는 엄마를 부르지 않는다. 춥고 외롭고 배고프고 두렵지만 도피처인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거기엔 유일한 친구 “아무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천사들”, 즉 “옥수수 알갱이 같은 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 ‘나무 위의 아이’에 등장하는 ‘악마의 서식지’와 ‘악마의 아내’를 통해 ‘사랑스러운 파괴자 H’의 정체는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엄마’가 아니라 ‘악마의 아내’일까?

그날
아빠 눈알이 뱅글뱅글 돌았어
엄마가 눈물 속으로 도망쳤어
나를 데려가지 않았어
- ‘그 밤’ 부분

엄마는 네가 아기여도 우리보다 너를 더 미워해. 우리가 나쁜 짓을 해도 너를 더 미워해.
- ‘바위틈의 언니’ 부분

아빠의 “눈알이 뱅글뱅글” 하던 그 날, 술에 취해 마당에 주전자를 집어 던지고 먹고 있던 무로 머리를 얻어맞던 그 날 밤, 엄마는 어린 나를 두고 혼자 도망친다. 아빠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도망을 치다가 치마가 찢어지고 발등에 감자만 한 혹이 났지만 나를 감싸줄 엄마는 곁에 없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언니마저 “엄마는 네가 아기여도 우리보다 너를 더 미워”하고, “우리가 나쁜 짓을 해도 너를 더 미워”한다며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이후에도 병든 엄마는 매일 누워 천장만 바라볼 뿐이고 어린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질 못한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엄마는 방관자이자 ‘악마의 동조자’일 뿐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어린 나는 그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눈으로 기억하고 가슴에 새긴다. 첫 시집 ‘앵무새 재우기’에서 어떤 상황을 세밀하게 집요하게 묘사한 시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반면 이번 시집은 관찰자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때로는 스스로 사물이 되어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표제시 ‘해맑은 웅덩이’는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과 대화, 혹은 독백하는 김개미 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녹슨 꼬챙이, 찌그러진 깡통, 병뚜껑, 병 쪼가리, 돌멩이 등을 먹는 것은 어둠과 죽음이고, 덤프트럭에 “순식간에 납작해”지지만 늘 당하는 고통이므로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면” 된다는 것은 빛과 삶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눈빛과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눈동자를 항시 의식하는 한편 끊임없이 죽음에 천착한다. 의식의 한 부분이 특정 어린 시절에 멈춰있는, ‘악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생각하는 시인이 동시(童詩)에 눈을 돌린 것은 “평생이 걸려서라도 당신을 용서”(‘평생’)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김개미 지음. 문학동네 펴냄. 128쪽/8000원

[시인의 집] 평생 잊히지 않는 눈동자, 혹은 죽음 같은 용서

  • 0%
  • 0%


오늘의 주요뉴스



종료된칼럼

베스트클릭

실시간 급상승

10초

5분간 수집된 조회수 기준

오늘의 운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