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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의 반성

<96> 서효인 시인 ‘여수’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7.04.1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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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의 반성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시인이 있다. 그곳에서 벌어진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를 재구성해 이루고 싶은 것을 상상하며 나를 반성하는 시인.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서효인 시인(1981~ )의 세 번째 시집 ‘여수’에 수록된 63편의 시 가운데 50편이 여수, 불광동, 곡성, 이태원, 강릉, 부평, 남해, 양화진, 강화, 자유로,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송정리역, 서울, 구로, 북항, 나주, 안양 등과 같이 시집 전체가 공간이라는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전두환이 잘 간다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샀어.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이름을 얼버무리며 우리는 얼른 촛불을 끈다. 오늘이 생일인 여자는 암살단의 일원과 연애를 했었다고 한다. 킬러와의 연애인가? 폭소가 반짝 일어나다 가라앉는다. 도대체 몇 살 차이야? 잠시 폭동이 일어난 거라고 너는 말했다. 전두환은 명절이면 동네 사람들에게 금일봉을 돌렸다고 해. 카드를 내밀며 여자애가 말한다. 통이 큰 사람이네. 암살은 실패했고 노인은 빵도 케이크도 잘 씹어 삼킨다. 우리는 셋인데 그들은 몇일까. 암살단이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몰랐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저택 앞에는 경찰이 둘 의경이 둘, 저택 뒷골목에는 의경만 둘이었다. 카페와 중국요릿집 사이를 불발된 폭죽처럼 비틀비틀 지나갔다. 좀 취한 건가. 생일이니까 괜찮다고 대답한다. 손에는 케이크를 자르던 플라스틱 칼이 있다. 다른 손에는 손을 잡고 담을 넘는다. 담을 넘어서, 담을 넘는데,
- ‘연희동’ 전문


먼저 시 ‘연희동’을 살펴보자. 연희동에 사는 전두환이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라는 전제하에, 누군가가 그를 암살하려 한다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은 현재와 과거가 혼재돼 있다. 오늘이 생일인 여자와 “이름을 얼버무”릴만큼 가깝지 않은 관계인 화자 그리고 노인까지 “우리는 셋”이라 했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노인은 사실 과거의 암살단일 것이고, 실상은 오늘의 암살단은 화자와 여자 둘이다. 노인이 시도한, 상상한 암살은 이미 실패로 돌아갔다. “전두환이 잘 간다는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러 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해 1차 암살은 실패한 것. “저택 앞에는 경찰이 둘 의경이 둘, 저택 뒷골목에는 의경만 둘”이 경호하고 있는 그의 저택을 침입하기 위해 화자는 담을 넘는다. 그런데 술에 취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케이크를 자르던 플라스틱 칼”이다. 보나 마나 암살은 또 실패할 것이다.

나는 앉는 일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는 대통령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 빠른 속도로 능선을 타고 넘었다. 생각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누군가 어젯밤의 뒤숭숭한 결과를 빈자리에 토해놓았다. 누군가 그를 목격했지만, 그는 겨울 짐승처럼 보였다. 나는 비칠거리는 몸뚱이를 손잡이 하나에 기댄 채, 토사물을 오래 노려보아야 했다. 그는 남쪽과 서쪽의 중간 즈음, 목표지를 정확하게 가늠했다. 예측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버스 기사가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뉴스는 중요한 소식을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호들갑이다. 그는 주파수를 맞춰 동료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오른편에는 얼어버린 한강이, 왼편에는 지저분한 도로가 누워 있다. 나는 부러웠다. 왼쪽 가슴팍엔 붉은 심장이,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날을 세웠다. 그는 무서웠다. 결과는 중력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다. 서울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정체라고 라디오는 전한다. 야전 지도는 서울의 서쪽 어딘가로 그를 이끈다. 우린 늦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다.

자유로는 광명과 자유를 주고, 자유로는 출근과 퇴근을 주며……

코트 자락으로 창에 붙은 서리를 닦는다. 상스럽게 토악질을 하고 있는 그가 보인다. 신물이 올라온다. 결과물이 토사물을 뱉어낸다.
- ‘자유로’ 전문


시 ‘자유로’도 ‘연희동’과 비슷하다. 출근길 만원버스에 탄 화자와 “대통령의 목을 따버리기 위해 빠른 속도로 능선을 타고 넘었”던 김신조가 중첩된다. “비칠거리는 몸뚱이를 손잡이 하나에 기댄 채” 서서 가는 화자는 “누군가 어젯밤의 뒤숭숭한 결과를 빈자리에 토해놓”아 앉을 수가 없다. “중력처럼 정해져 있는” 결과는 “우린 늦었고 그는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황상 토사물을 뱉어낸 그는 김신조이어야 하지만 목사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상상이다. 혼자 “남쪽과 서쪽의 중간 즈음”에 살아남은 그가 목사가 된 것이 구역질 나는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의 시가 다 심각한 시대 상황과 역설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니다. ‘불광동’은 폐지를 줍는 노인의 삶을, ‘강릉’은 오징어를 통한 우리의 사랑을, ‘구로’는 대우어패럴에 다닌 이모와 가리봉동에서 옷을 사는 나를, ‘분당’은 죽은 동창의 조문에서 조의금 액수에 고민하는 남자 등과 같이 많은 시편이 소소한 일상과 죽음, 섹스를 소설적 구성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그 바탕에는 우울과 절망, 조소가 ‘젊은 날의 초상’처럼 깔렸다. 야전 지도, 총, 휴가, 폭탄, 훈련소, 군용 트럭, 탈영, 병사, 파병 등과 같은 군대와 관련된 시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책표지에서 밝힌 것처럼 여수는 시인의 처가가 있는 도시다. 이를 고려할 때, 표제시 ‘여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날의 상황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날 하필 비가 내리는데,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지는 공장의 굴뚝에 시선이 머문다. 흰 빨래를 내어놓질 못할 만큼 공기가 좋지 못한 도시에 사는 여자와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비, 공장의 굴뚝, 빨래 등은 남녀 간의 사랑을 암시하고,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라는 것은 평생의 사랑을 의미한다.

“수년간 발표한 시를 모으니 그때는 몰랐던 여성혐오가 지금은 보여 빼거나 고친 시가 몇 있다”는 시인의 고백을 감안할 때, 이번 시집은 “끝이라 생각한 곳에” 선 시인이 방관자로서 방조, 혹은 부지불식간에 행해졌을지도 모르는 여성편견이나 폭력에 대한 반성임을 알 수 있다.

◇여수=서효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34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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