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나는 오디도 설탕도 아니다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자인 이재연(54) 시인의 시집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를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했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에는 당선작이자 표제시인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등 42편의 시가 실려 있다.


구름 한 조각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오르는 “어두운 구름 한 조각”에서 몰고 올 비를 상상한다. 그래서 그 비가 “도시를 덮을 수 있겠”으니 “우산을 준비해야겠다/ 지층을 두드려 마른 샘을 불러 모아야겠다”고 한다.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조각”에서 시작한 비가 “도시를 다 덮을 수 있겠다”는 공간 확장의 상상과 하늘-지상-지하로 이어지는 공간의 수직적 이동이 시의 넓이와 깊이를 주어 독자에게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시 ‘착란’에서 “10월이다/ 잎이 무성한 목련나무에/ 계절의 차이를 잃은 꽃봉오리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있다/ 보다가 웃고 웃다가 근심하고 근심하다가/ 그 착란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다”는 시인은 인간 소외와 불모의 현실을 영화나 고전, 그리고 종교적 어휘를 인유해 보여준다. 아래 시는 소외의 형식을 오래된 아파트 식탁을 의인화하여 진술한다.

더 이상 그늘을 찾을 수 없는
밝고 환한 기념일에 기대어
어둠이 없는 것처럼
조금씩 웃다가
아파트로 돌아와
오래된 식탁의 체위 위에 동그랗게 엎드린다
유리병 속 바닥에 엎드린 오디처럼
흔하고 향기로운 빛의 층계, 나는 이전의 형질이 아니다
지금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너의 집에
없는 것처럼 앉아있다 나는
오디도 아니고
설탕도 아니다
- ‘식탁의 주인’ 전문

아파트로 돌아온 화자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너의 집” 즉, 오래된 식탁이 주인인 “집에/ 없는 것처럼 앉아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앉아 있는 모습은 형질을 잃어버린 본래 모습과 다른 “유리병 속에 엎드린 오디”같다. 그러나 오디도 설탕도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형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 ‘뒤에 올 일’에서 “이유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계절/ 나무들 풀피리 분다/ 가지 끝에 버들잎, 나는 순한 동물/ 환한 잠의 모퉁이에서 일어나/ 희미한 꿈을 털어버리고 젖은 머리를 가볍게 말린다”고 고백한다.

전남 장흥에서 출생해 학부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시인은 현재 전남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12년 실천문학사에서 주관하는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이재연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142쪽/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