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산책에서 깨달은 참 깊고도 넓은 시

2012년 시집 ‘둥근 시’로 등단한 유기택(1958~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참 먼 말’은 산책시편이라 할 만큼 생활 근거지인 강원도 춘천의 샘밭 주변을 거닐며 마주치는 사물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사색한다.


두 번째 시집 ‘긴 시’가 역설이나 촌철살인의 시 세계를 보여줬다면 이번 시집은 존재론적인 자기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짧은 시 85편을 엮은 두 번째 시집에서 “바람 한 촉 꽂아놓고 봄밤이 다 환합니다”(‘민들레 아이’ 전문), “다 살았다”(‘긴 시’ 전문), “너도 얼어붙기까지 오래 망설였을 것이다”(‘빙점’ 전문)와 같이 단 한 행의 짧은 시에 광활한 우주나 오묘한 인생, 자연 섭리에 따른 깨달음을 ‘아!’ 소리가 절로 나오게 표현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 ‘민들레 아이’에서는 “바람 한 촉 꽂아” 금방이라도 허공으로 날아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오히려 ‘환한 봄밤’으로, 즉 동적 세계를 순식간에 정적 세계로 전환하는 고도의 테크닉을 발휘했다. ‘긴 시’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딸랑 “다 살았다”는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 한 생, 즉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다 담겨 있다. ‘빙점’ 또한 물이 어는 순간의 긴장을 “오래 망설였을 것”이라는 정감 어린 시구를 통해 한순간 긴장의 끈이 툭 부러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는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이 따스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내는 나비가 되려나 봅니다

며칠 춥고 눈도 내리더니
꿈이 시린지, 이불을 돌돌 말고
번데기처럼 새벽잠이 들었습니다

슬며시 이불을 밀어주고
잠을 터는데
무슨 원망 같은 잠꼬대를 듣는데

우린 너무 오래 함께 살았습니다

눈꽃은 꽃이 아닌 걸
나는 꽃이 아닌 걸
꿈은 손 시린 꽃인 걸

“아유, 곱기두 해라!”
아내는 꽃꿈을 꾸고 있나 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아내의 봄은 너무나 먼 데입니다
- ‘미리 봄날’ 전문

반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아내와 잠을 자는 중에도,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산책을 하는 중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중에도 사물과 소통한다. 시 ‘미리 봄날’은 늦겨울 새벽잠을 자는 아내의 잠꼬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불을 돌돌 말고/ 번데기처럼 새벽잠”이 든 아내를 본 시인은 아내가 나비가 되고 싶은가보다고 생각한다. “슬며시 이불을 밀어주고” 일어나는데 아내가 “무슨 원망 같은 잠꼬대”를 한다. 순간 시인은 우리가 “너무 오래 함께 살”아 아내가 잠을 자면서도 자신을 원망한다고 오해한다. 그때 아내가 “아유, 곱기두 해라!” 잠꼬대한다. 아내 잠꼬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아내의 봄은 너무나 먼 데”있다고 자책한다. 아내가 잠꼬대하는 순간에도 오해하고 원망하는, 거리감을 느낀 데 대한 시인의 반성이 “아내의 봄은 너무나 먼 데”있다는 시구에 다 들어 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

표제시 ‘들길을 걷다 당신은’은 산책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산책길 골목에서 만난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는 다 각자의 ‘길’을 가지고 있으며, 산과 들, 자연에 있어야 할 꽃들이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사람의 뒤란”에서 또 다른 길을 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길은 많이 존재하지만 꽃들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겨우 하늘로 길을 낼 뿐이다. 하지만 꽃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활짝 웃”는 긍정의 마인드를 보여준다. 시인은 “꽃 이름인 저 골목들”에 환한 가로등을 밝힌다.

세상은 춤판입니다
요지경 따위는 없습니다
막연히 살고 싶은 생각이 모두 춤입니다

길 위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 몇이
빠른 춤으로 길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새가 직선으로 날 때는
추락하고 있을 때뿐입니다

사는 일은 우줄거리며 춤추는 노동입니다

같이 춤추실래요
막춤이라고 한들 누가 뭐라긴 하겠는지요
- ‘발견’ 전문

평소 산책하면서 사색을 즐기는 시인에게 “세상은 춤판”(이하 ‘발견’)과 다름없다. “막연히 살고 싶은 생각이 모두 춤”이다. “사는 일” 또한 “우줄거리며 춤추는 노동”이다. 살고 싶은 생각과 사는 일이 다 춤이라는 발견은 “무엇에 머물지 않으려고/ 무엇이 되고야 마는 무상”(‘꽃, 개미지옥’)과 다르지 않다. “아무렇지도 않은 저녁이 아무렇게나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데로나 가버리”(‘아무라는 미상의 미상불’)므로 시인은 삶과 죽음, 깨달음, 소유와 무소유, 사색하는 나까지도 무의미하다. 나를 발견하는 일이나 말, “진실은 뜻밖에 짧다”(‘뻥 1’)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유기택의 시세계는 노장의 소요유(逍遙遊)나 지북유(知北遊), 불교의 공(空)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그의 시는 음미하면 할수록 참 깊고도 넓다.

◇참 먼 말=유기택 지음. 북인 펴냄. 136쪽/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