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경계가 안개 한 꺼풀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으로도 불린다. 화자는 화엄사 경내에 핀 배롱나무를 전등에 비유하고 있다. 환한 꽃잎들이 먼 곳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밤에는 석등이 불을 밝히지만 낮에는 앞산이 눈부시게 밝은 이유는 흐드러진 배롱나무꽃 때문이다. 이 배롱나무꽃은 대개 여름에 더위와 함께 핀다.
화자는 백 년만의 폭염이 내리쬐는 여름날 화엄사에 들러 이 배롱나무꽃을 만나 배가된 폭염을 느낀다. 바람도 불지 않는 이 여름날은 삼복염천이다. 배롱나무 가로수는 실핏줄을 터뜨려 지은 꽃길 같다. 오래 삭힌 피점이 돋는 길이다.

이렇게 강렬하고 폭력적인 비유적 진술이 가득한 시집을 낸 김택희 시인은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2009년 ‘유심’으로 등단하였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의 시집에는 꽃의 비유가 많다. 시인은 폭설에서 ‘겨울 꽃’을 상상해 내기도 한다. 겨울에 꽃이 피다니, 이는 또한 낯섦의 효과를 노리는 시인의 방법적 전략이다.


붉게 흥분된 목소리가
무릎까지 쌓인 눈을 넘는다
송신탑을 건너오는 고향의 폭설을 바라보며
최면처럼 당초문을 따라간다

굽어든 골목마다 부시다
한 자쯤 내린 눈이 마을의 지붕을 만들고
키를 낮춰 바닥에 가라앉혔다
소음마저 하얗게 매몰되고 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눈 속에 묻힌 시골집 뜰
마른 감나무 같은 노구의 휘어진 등 그림자
유리창에 내비친다

어른거리는 풍경이 푸른 우물길이 되는 곳
내 안의 떫은 맛 몇 번을 우려내어
말랑하게 키워주던 숨결
하얗게 오른다
- ‘겨울 꽃’ 전문

화자는 고향의 폭설 소식을 송신탑을 건너오는 전화기를 통해 듣고 흥분을 한다. 곧 무릎까지 쌓였던 고향의 눈을 상상을 한다. 최면이 걸린 듯 고향 생각이 당초문처럼 뻗어간다. 기억이 당초문을 따라 고향에 가면 폭설이 내린 고향의 눈부신 골목이 보이고, 눈이 한 자쯤이나 덮은 지붕이 보이고, 흰 눈이 덮어 소음이 매몰된 풍경이 보인다.

이런 폭설의 고향은 밤의 밑바닥까지 하얗다. 눈에 묻힌 시골집 뜰과 오래된 감나무의 휘어진 그림자가 유리창에 내비치던 모습도 기억난다. 감나무에서 떪은 감이 연상되고, 이 떫은맛은 화자의 젊음과, 이런 젊은 시절을 성숙하게 한 고향을 연상한다.

시 ‘보리암’에서 화자는 발아래 풍경을 내려다본다. 남해 전경이 “눈길 닿는 곳마다 넉넉한 풍경화”이다. 안개가 걷히자 절벽 아래 풍경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 멀미가 나는 정황에서 화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안개 한 꺼풀이”라는 깨우침은 얻는다. 이런 깨우침의 결과가 향기로운 함박꽃으로 암시된다.

이밖에 목련, 민들레, 쿡소니아, 동백 등 꽃의 비유가 곳곳에서 폭력적이고 아름답게 나타난다. 이런 김택희 시집 한 권을 들고 봄에서 여름 사이 여행을 탁! 떠날 것을 권유한다.

◇바람의 눈썹=김택희 지음. 문학수첩 펴냄. 175쪽/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