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마시고 낙서하고…치맥 안 부러운 미술관

크리에이터 그룹 '아더'(ADER)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디프로젝트 스페이스-구슬모아당구장' 전경(왼쪽) 공간 이름을 딴 수제 맥주와 함께 전시를 감상할 수도 있다. /사진=박다해 기자

클럽에 온 듯 귀를 쾅쾅 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바닥엔 어린이 볼풀장에서나 볼 법한 플라스틱 볼이 가득하고 전시장 한 편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있다. 원한다면 전시장 이름을 딴 수제 맥주 한 잔을 들고 전시를 둘러볼 수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구슬모아당구장' 풍경이다.


고풍스러운 벽지에 둘러싸인 공간, 작품과 멀찌감치 떨어져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는 엄숙한 분위기…'미술관'하면 떠오르는 고정관념이 더 이상 유효하진 않을 것 같다. 관람객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미술관들이 앞다퉈 문턱을 낮추고 있기 때문. 심오한 예술의 세계는 잘 몰라도 괜찮다. 영화관을 찾듯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미술관들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열리는 크리에이터 그룹 '아더' 전시 전경/ 사진제공=대림문화재단

◇ "퇴근하고 오세요" 야간개장하는 미술관들

대림미술관, 디뮤지엄과 함께 대림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디프로젝트 스페이스-구슬모아당구장'은 최근 확장 이전하면서 관람시간을 저녁 10시까지 연장했다. 낮과 밤의 풍경도 다르다. 낮에는 작품감상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밤에는 맥주 한 잔을 즐기며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음악도, 조명도 바꾼다. '구슬모아당구장'측은 "전시장 내에서 마시는 음료와 주류는 전시와 연계해 특별하게 기획된다"며 "관람객들이 보고 마시는 모든 콘텐츠를 '구슬모아당구장'만의 색깔로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젊은 창작자들을 발굴, 지원하는 '구슬모아당구장'은 2012년 개관한 뒤 지난해까지 설치, 다원예술, 미디어아트, 사진, 건축, 패션, 가구 디자인, 애니메이션, 영화, 문학, 음악 등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자들의 색다른 시도를 선보였다. 이전한 뒤 선보인 첫 전시는 크리에이터 그룹 '아더'(ADER)의 전시로 7월 15일까지 열린다.

K현대미술관의 '이것은 현대미술관이다'전시에 출품된 작품 '테이프 서울'. 몇백개의 테이프를 감아서 만들어내는 대형 구조물로 관람객들은 구조물 안에 들어가 자유롭게 공간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다. /사진제공=K현대미술관

K현대미술관 역시 지난해 12월 개관 때무터 '야간 개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밤 10시~11시까지 운영한다. 강남구 신사동에 자리한 위치도 이점이다. 직장인들이 퇴근한 뒤 방문해도 전시를 볼 시간은 넉넉한 편. K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영화를 보듯 미술관 관람도 생활의 일부로 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취지에서 야간 개장을 결정했다"며 "현대미술을 보다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직장인 이주현씨는 "파리나 런던 등 해외에서도 '미술관의 밤' 행사를 여는 등 야간개장을 하는데 한국에서도 관람 시간이 연장되니 반갑다"며 "여가시간이 부족한 직장인도 관람할 수 있어서 좋다. 또 미술관 관람 자체가 한적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놀거리'로 떠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K현대미술관에선 9월 1일까지 '이것은 현대미술관이다'전을 만날 수 있다.

일민미술관의 '두 잇'전시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관람객이 직접 책 구절을 자르고 붙일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공간 /사진=박다해 기자

◇ "참여해야 완성됩니다"…관람객도 작가로 초청하는 미술관들

관람객들의 참여로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전시도 잇따라 선보인다. 7월 9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두 잇'(do it)전은 대표적인 참여형 전시다. 스위스 출신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1993년 '끊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구상한 '열린 전시'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쓴 '작업 지시문'을 모았다. 전시 개최국의 참여작가는 이를 재해석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관람객도 지시문에 따라 작품에 참여한다. '여러 장의 종이에 당신의 서명을 연습해 보시오'란 지시문을 보고 직접 서명을 연습하는가 하면 칠판으로 된 바닥에 낙서를 하고, 좋아하는 구절을 책에서 오려 붙여 작품을 완성한다. 일민미술관은 공공장소나 집, SNS 등 다양한 공간에서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 플랫폼도 구축했다.

일민미술관 관계자는 "지난해 (미술관이 있는) 광화문에서 장기간 열린 촛불집회에서 무언가를 함께 이뤄내는 공동체를 보면서 공동체가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열고 싶어 (이번 전시를) 개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두 잇' 전시를 감상한 직장인 배모씨는 "사람들이 (지시문에 따라) 미술관 한 쪽에 앉아서 직접 종이를 자르거나 풀로 (작품에) 붙이고 있는 모습을 봤다. 참여형 전시라 독특하고 신기했다"며 "너무 흥미 위주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던 현대미술이 문턱을 낮춰 더 많은 대중을 만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가람 작가가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 '셀피'전에서 자신의 설치작품인 '#셀스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다해 기자

'셀스타' 작품 안쪽엔 직접 화장을 할 수 있는 화장품들이 진열돼있다. /사진=박다해 기자

사비나미술관이 8월 4일까지 선보이는 '셀피'전 역시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김가람 작가의 설치작품 '셀스타'에는 화장품과 셀피 전용 카메라가 함께 진열돼있다. 관람객은 직접 화장을 한 뒤 카메라로 '셀피 인증샷'을 찍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이어 '#셀스타'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사진을 SNS에 공유한다. 작가는 관람객의 참여를 기반으로 매일 미술관의 주인공을 선정, 전시장에 '오늘의 셀스타'란 제목의 영상을 상영한다. 관람객의 참여, 작가와의 상호작용으로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는 셈이다.

강재현 사비나미술관 큐레이터는 "요즘은 미술관이 하나의 '포토존'으로 활용되는 점에 착안해 기획한 전시"라며 "특히 학생들은 줄을 서서 작품에서 사진을 찍길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좋다. 단순히 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