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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은 서희처럼! 북핵위기 안 싸우고 해법내려면?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5 – 서희 : 지피지기로 거란 침입을 물리치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입력 : 2017.08.2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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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은 서희처럼! 북핵위기 안 싸우고 해법내려면?


“거란을 따르지 않으면 80만 대군이 휩쓸어버릴 것이니 투항하라!”

서기 993년 요나라, 즉 거란의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온 적장 소손녕이 고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가 보낸 문서에는 협박과 으름장이 가득했다. 요즘으로 치면 ‘화염과 분노’나 ‘괌 포위공격’ 같은 ‘말 폭탄’들이었다. 고려 조정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중군사 서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임금과 신하들을 달랬다.

“거란의 기세를 꺾고 협상할 수 있는 기미가 보입니다.”

서희는 무엇을 꿰뚫어본 것일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 지침은 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길을 열어준다. 고려 최초의 외침으로 기록된 거란의 1차 침입은, 상대를 정확하게 간파한 서희의 담판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작금의 한반도 긴장 국면에 참고할 수 있는 사례다.

사실 요나라는 한국인에게 낯선 이름이다. 그나마 2009년작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상세히 다뤄준 덕분에 조금 익숙해졌을 뿐이다. 이 나라는 북방 유목민족 거란이 916년에 세웠으며, 창업자는 야율아보기다. 926년 고구려 유민이 이끄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10세기 중반에는 연운 16주(오늘날의 베이징, 허베이, 산시 일대)를 차지했다.

한편 918년 건국한 고려는 태조 왕건의 유훈에 따라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했다.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제2의 도읍으로 삼고,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간 것이다. 991년에는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백두산 바깥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등장한다. 그것은 곧 거란 영토와 맞닿게 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요나라는 송나라와 첨예하게 맞서고 있었다. 송나라는 오대십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원의 새 주인이 되었는데(960), 연운 16주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이었다. 요나라도 연운 16주를 발판으로 중원까지 내달리고 싶어 했다. 연운 16주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두 나라는 모두 고려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고려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986년 요나라가 송나라에 대승을 거두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자 입장을 바꿨다. 고려 성종은 송나라와 손잡고 거란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고려의 북진정책에 심기가 불편했던 요나라로선 가만둘 수 없었다. 송나라와 계속 싸워야 하는데 배후에서 뒤통수치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요나라 권력자 승천황태후는 고려정벌을 결정했다. 사위 소손녕에게 고려를 복속시키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국제정세에 밝았던 서희는 거란 침입의 실상과 의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광종 때 중국인 쌍기가 도입한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되었다. 특히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태조 조광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외교에 정통했다.

서희는 “거란을 따르지 않으면 휩쓸어버리겠다”는 소손녕의 협박을 거꾸로 해석했다. ‘따르는 시늉만 하면 전쟁은 없다’는 의미가 숨어있었다. 그가 “협상의 기미가 보인다”고 한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임금과 신하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소손녕이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며 “고려가 침략해 차지한 평양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냉큼 넘기려 했다. 서희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적의 군세가 강성하다고 평양 이북 땅을 넘겨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북한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떼어달라고 하면 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이면 우리 국토가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의 승부는 군대의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잘 살펴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 일단 싸워보고 다시 의논하소서.”(고려사 열전)

서희가 볼 때 땅을 내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한번 호구 잡히면 영원한 호구로 전락하기 쉽다. 최소한 적과 싸워서 전력이라도 파악해야 한다. 전쟁은 쪽수로 하는 게 아니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리면 이길 수 있다. 협상할 때 협상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보여줘야 주도권을 확보할 게 아닌가.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건 오히려 거란 쪽이었다. 사실 그들은 80만 대군이 아니었다. 고려를 휩쓸어버릴 병력이 못되었다. 게다가 거란군은 평지를 내달리며 속전속결 하는 유목민족 군대였다. 산악지대를 활용해 치고 빠지는 고려군의 전술이 괴로웠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결국 소손녕은 청천강을 건너서 섣부른 공격을 감행했는데, 안융진에서 고려군의 결사항전에 막혀 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거란군이 출구를 모색해야 할 상황이었다. 서희는 지금이 바로 협상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원해서 적진에 들어갔다. 목숨 걸고 담판을 벌이러 간 것이다. 소손녕은 또 다시 평양 이북 땅을 요구하며 왜 요나라에 복속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서희는 차분히 명분과 실리를 따졌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예다. 그래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논하자면 요나라 동경도 모조리 옛 고구려 땅인데, 어찌 우리가 평양 이북 땅을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사신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압록강 안팎의 여진족 때문이다. 그들이 길을 막으니 요나라로 가는 게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우리의 옛 영토에서 여진을 쫓아내고, 성을 쌓아 길을 연다면 어찌 사신을 잘 보내지 않겠는가?”(고려사 열전)

소손녕은 승천황태후의 승인을 받아 청천강에서 압록강까지 옛 고구려 땅에 대한 고려의 권리를 인정했다. 상대의 실상과 의도를 꿰뚫어보고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한 서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이듬해부터 이곳에 성을 쌓고 강동 6주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 담판이 고려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건 아니었다. 원래 협상이란 주고받는 것이다. 고려는 이후 한동안 요나라에 사대하고 거란의 연호를 써야 했다.
담판은 서희처럼! 북핵위기 안 싸우고 해법내려면?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8월 25일 (17:1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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