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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조선의 주막거리, 죽령옛길을 걷다

<76> 죽령옛길을 걷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7.08.2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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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온갖 넝쿨이 어우러진 숲길.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온갖 넝쿨이 어우러진 숲길.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여름이 설핏 기우는 계절, 더위 때문에 미뤄뒀던 여행을 떠난다. 죽령옛길을 걷기 위해 소백산으로 가는 중이다. 단양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차선 도로로 접어든다. 소백산 자락을 타고 구불구불 달리는 길은 여유롭고 싱그럽다. 죽령 고개를 넘고 희방사 가는 길을 지나 우회전한다. 과수원을 끼고 조금 들어가면 소백산역. 그곳에 차를 세워두고 죽령옛길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길은 금세 숲속으로 머리를 감춘다. 조금 걷자 세상이 환해진다. 느닷없이 나타난 과수원 덕분이다. 나무들은 등불을 걸듯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 사이를 걷다 보니 꿈결인 듯 황홀하다.

깊은 숲속으로 달아난 길을 찾아 나선다. 여름의 끝머리를 품고 있는 숲은 여전히 짙고 푸르다. 조금 뒤 돌무더기 하나가 나타난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면서 쌓은 것일 게다. 아니면 나그네가 무사히 지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하나 둘 던진 게 쌓였을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호환(虎患)을 피하게 해달라고, 도적떼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할 그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길은 과거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길이었다.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 열린 건 신라 때였다. 죽령 일대는 신라‧고구려‧백제가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벌이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춘사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년) 때 다시 신라가 회복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길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물론 온갖 장사꾼들이 넘나들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주막은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이 길이 계속 각광을 받은 건 아니었다.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더니 1960년대에는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국내 최장터널인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고갯길은 조금씩 지워져 숲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까맣게 잊혔다. 그러다가 근래 들어 시작된 걷기 열풍으로 찾는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길 주변에는 다래넝쿨과 온갖 잡목이 얽히고설켜 마치 원시림을 걷는 것 같다. 중간중간 안내판을 세워 길에 얽힌 이야기와 전설들을 자세히 적어 놨다. 왕건도 나오고 ‘다자구할머니’도 나오고 주세붕도 나온다. 또 야생화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놓았다. 길을 걷는 재미 중 하나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깃들어 사는 생명을 만나는 것이다.

막바지에 만나는 죽령루.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막바지에 만나는 죽령루.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조금 더 올라가니 낙엽송(일본 잎갈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활엽수 숲만 걷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침엽수들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낙엽송들이 뜸해질 무렵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죽령마루에 거의 다 왔다는 신호다. 숨이 턱에 찰 무렵 저만치 우뚝 선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도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죽령루(竹嶺樓). 헐떡거리며 고갯마루로 올라선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시계를 본다. 안내에는 총 2.5km에 40~50분이 걸린다고 돼 있었지만, 이것저것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한 시간이 넘어버렸다.

죽령루에 올라가 풍기 쪽을 굽어본다. 사람 사는 세상이 멀고도 가깝다. 올라왔으니 다시 내려가야 한다. 출발지까지 가면 5km 남짓 걷는 셈이다. 내려가는 길에 올라올 때 못 봤던 주막 터를 발견한다. 고개 정상의 주막거리가 가장 컸고 이곳은 좀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여기저기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고 구들장의 흔적도 보인다.

“왜 이렇게 늦어. 탁배기 한 잔 하고 국밥 한 그릇 말아 달라니까.”

“아, 조금만 기다려요. 애를 배기도 전에 내 놓으래….”

눈을 감으면 떠들썩한 소리가 들릴 것 같지만 아련한 옛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은 고요 속에 잠겨있다. 넝쿨들이 자꾸 담장으로 손을 뻗고 있다. 저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까지 오를 수 없음을 알까?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가득 찬 느낌이다. 나는 지금 1800년의 시간 속을 다녀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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