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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부른 큰소리? ‘삼학사’의 가슴 찡한 최후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6 – 삼학사 :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은 언관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입력 : 2017.09.09 06:28|조회 : 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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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부른 큰소리? ‘삼학사’의 가슴 찡한 최후


“지금 사신이 온 것은 후금의 칸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은 대국 명나라의 천자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데 어찌 이런 말이 들린단 말입니까. 후금 사신을 참하고 머리를 명나라 조정에 보내 그들이 황제라 일컫는 것을 꾸짖으소서.”(인조실록)

1636년 2월 후금 사신 용골대와 몽골 귀족들이 홍타이지 칸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제안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다. 사헌부장령 홍익한은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분명히 하라고 인조에게 상소했다. 병자호란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 순간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얼어붙은 산성에 고립된 채 조선의 운명을 결단해야 했던 그 절체절명의 시간을 그려냈다.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처럼 주화(主和),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과 척화(斥和), 그것을 배척하는 김상헌의 대립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 선비들이 격렬하게 쏟아낸 ‘큰소리’였다.

‘유교국가’ 조선은 선비의 정의로운 말을 숭상했다. 특히 언론을 담당하는 삼사(三司 :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들은 의리(義理)를 따지며 임금과 고관들을 비판하고 탄핵했다.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과격한 말을 거침없이 쏘아붙여야 절의를 갖춘 선비로 칭송받았다. 조선에서는 이들의 언로를 중시했고, 삼사 또한 출세코스로 여겨졌다.

문제는 그 큰소리가 불가역한 대의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변화하는 현실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1627년 정묘호란을 겪으며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는데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계속 인정받았다. 그런데 이후 후금이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압도하면서 천하의 질서는 급속도로 재편되었다. 몽골은 물론 명나라 관리들까지 후금에 투항하는 지경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이 냉엄한 역사의 흐름을 부정했다. 홍타이지 칸의 황제 등극은 오랑캐가 명나라를 제치고 천자국, 즉 천하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요, 부모를 버리는 것과 같았다. 삼사를 중심으로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둥, 정묘년 화친부터 잘못됐다는 둥 험악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신단은 황급히 도망갔다.

이로서 조선은 후금과 국교를 끊고 전쟁 국면에 돌입했다. 하지만 막상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자 공포심이 엄습했다. 당시 후금군은 팔기를 앞세워 대륙을 호령하는 무적의 특전사였다. 게다가 투항한 명군과 몽골군도 만만치 않았다. 반면 조선군은 농사짓다가 1년에 한두 번 연병장 도는 예비군 수준. 훈련도감 등 상비군이 있었지만 병력과 무기가 달렸다.

영의정 김류를 비롯한 대신들은 내심 화친을 원했지만 비난이 두려워서 눈치만 살폈다. 김상헌 등 화친을 배척하는 신료들도 목소리만 높일 뿐 실질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그 사이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전쟁준비에 착수했는데 조선은 우물쭈물 시간만 허비했다. 보다 못해 최명길이 나섰다.

“지금이라도 체찰사와 도원수는 평안도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평안병사는 의주로 나아가 장졸들을 독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나라 수도) 심양에 서찰을 보내 오랑캐의 정황을 탐색하고 후일을 도모할지 한바탕 싸울지 결정하소서.”(인조실록)

최명길은 일단 결전태세부터 갖추고 적의 실상과 의중을 살피자는, 그이답게 현실적인 대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삼사의 언관(言官)들은 이미 절교했으니 사신 파견이나 정탐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최명길도 물러서지 않았다. 언관들이 어려서 군사기밀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며 국가대사는 임금과 대신들이 의논하여 결정하자고 한 것이다.

삼사는 들끓었다. 홍문관수찬 오달제는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게 화친을 시도하는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홍문관교리 윤집도 직격탄을 날렸다.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최명길은 진회보다 나쁜 자”라고 했다. 진회는 중국 남송의 재상으로 명장 악비를 죽음으로 내몰고 금나라와 화친한 간신의 대명사였다.

겨울이 오고 강물이 얼면 적이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몽롱한 상태로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14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팔기의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12월 14일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궁궐을 나서던 인조 일행은 청나라 선봉대가 서울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기겁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도망쳤고 청군은 이중삼중 포위망을 구축했다. 조선의 운명은 얼어붙은 산성에서 시들어갔다.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 식량이 문제였다. 임금과 신하, 그리고 군사 1만 5천여 명이 버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결국 성을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청나라는 전쟁을 부른 척화파 두세 명을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때 자원해서 죽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 바로 삼학사, 홍익한과 윤집과 오달제다. 과연 조선 백성 수십 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간 전란이 그들의 찬란하지만 허무한 말 때문이었을까? 알고 보면 세 사람은 유교국가의 언관으로서 본분을 다했을 뿐, 정작 직무유기를 한 것은 ‘우왕좌왕’ 방비를 하지 못한 임금과 대신들이었다.

삼학사가 나라를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은 고귀한 용기였다. 홍익한과 윤집과 오달제를 처형한 청나라조차 후일 그 충절에 감동하여 사당을 지어주었다. 노모와 신혼의 아내를 남기고 떠난 오달제의 시구가 가슴 찡하다.

“외로운 신하의 의리 부끄럽지 않으나, 슬픈 일은 늙으신 어머님 날 기다리는 거라오. 부부의 온정 중한데 살 길을 점칠 수 없으니, 그대 뱃속의 아이나 잘 보호하오.”(충렬공유고)
전쟁 부른 큰소리? ‘삼학사’의 가슴 찡한 최후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9월 8일 (17:29)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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