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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불갑사 배롱나무가 준 선물

<78> 불갑사 배롱나무가 준 선물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7.09.0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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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노랑상사화.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노랑상사화.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느닷없이 불갑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가을이 왔다는 성급한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언가 보고 싶을 때는 만사 제치고 떠나야 한다. 자칫 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고창 선운사나 영광 불갑사 등은 꽃무릇의 세상이 된다. 산 곳곳에 붉은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풍경 앞에서 누구나 감탄사를 아끼기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때를 가늠하는 데 실패했다. 마음만 급해서 불갑사까지 갔지만 꽃무릇은 너무 일러 피지 않았고, 한 계절을 난 노랑상사화만 초가을 햇살 아래 시들어가고 있었다. 노랑상사화는 7월 말에서 8월 초에 피기 시작해 여름과 함께 지는 꽃이다. 반면에 꽃무릇은 9월 중순쯤에나 피는 가을꽃이다.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9월 초에 찾아갔으니 둘 다 놓칠 수밖에.

상사화와 꽃무릇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갑사에서도 꽃무릇이 한창일 때 여는 축제를 ‘상사화 축제’(올해는 9월 15일~24일)라고 부른다. 안내문에는 꽃무릇을 상사화의 일종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엄연히 다른 꽃이다. 상사화는 수선화과 상사화속 상사화고 꽃무릇은 수선화과 상사화속 석산이다. 속까진 같지만 종에서 갈린 것이다. 상사화는 백합이나 원추리 비슷하게 생긴 분홍이나 노란색 꽃을 피운다. 이에 비해 붉은 꽃을 피우는 꽃무릇은 꽃잎이 훨씬 가늘고 곱슬머리처럼 말려 있다. 결론적으로 불갑사 주변에 9월에 피는 빨간 꽃은 상사화가 아니고 꽃무릇이다.

아무튼 그 멀리까지 가서 꽃무릇을 못 봤으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그래도 그냥 돌아설 수 없어서 불갑사를 찾았다.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384년)때 인도스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맨 처음 지은 도량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절 이름이 부처 불(佛), 첫째 갑(甲)이다. 불갑사의 문화 재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대웅전(보물 제830호)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서 고풍스러워 보이는 이 건물은 처마 조각과 연꽃 문양의 문살 등이 유명하다.
불갑사 대웅전 옆의 배롱나무.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불갑사 대웅전 옆의 배롱나무.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뜻하지 않은 풍경을 만난 것은 만세루, 명부전, 일광당, 팔상전 등을 천천히 돌아보고, 대웅전 부처님에게 인사를 마친 뒤 돌아서는 참이었다.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환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섰다. 계단 중간쯤 화단에 뿌리를 내린 키 큰 배롱나무였다. 절집마다 흔한 게 배롱나무인데, 어찌 된 일인지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본 배롱나무 중 가장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만치 않은 세월이 고스란히 읽혀졌다. 꽃을 피우도록 허락된 100일을 거의 채웠는지, 가지 끝으로 밀려난 꽃은 구름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갔다. 가지마다 붉은 등을 켜들고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사실 배롱나무만 서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롱나무의 배경으로 서 있는 작은 절집과의 어울림이 특별했다. 절집은 소박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평범했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인지 현판도 붙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지런하게 쌓은 돌담과 아담하게 자리 잡은 황토색 대문이 보기 좋았다. 대문에 붙은 거북 모양의 큰 자물쇠도 눈길을 끌었다.

결정적으로 내 걸음을 묶은 것은 이 절집과 배롱나무가 연출하는 조화였다. ‘한 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른 수사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 풍경 위로 설핏 기우는 햇살과 늦여름의 쓰르라미 소리가 꿈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속에 나를 던져놓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음에 고요와 희열이 깃들었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었다. 꽃무릇은 볼 수 없었지만, 배롱나무가 있는 풍경 하나로 충분했다. 다녀온 지 며칠 지난 지금도 뇌리에는 배롱나무 꽃이 반짝거리며 등불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 풍경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배롱나무 꽃은 조금 더 지고 꽃무릇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순서를 바꾸며 잠깐씩이라도 주인공이 돼보는 것이다. 앞에 온 것들은 뒤에 온 것들이 조금 더 빛나도록 하기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가 있다. 길이, 그리고 여행이 여행자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9월 8일 (13:52)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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