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국화분과 풀벌레와 달빛

봄여름을 거치며 비바람 맞고 자란 국화가 가을에 꽃을 피웠다. 시인은 국화분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그러자 가을이 국화분을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서 가을 풀벌레 소리도 달빛도 방 안으로 들어온다. 꽃이 환하니 인공인 초롱불을 꺼도 된다. 국화와 함께 있으니 쓸쓸하지도 않다. 밖에서는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란 감이 익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에 소개하기 좋은 시다. 짧지만 국화 하나에서 시작된 연쇄적 상상이 사뭇 마음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한다. 시 ‘그 겨울밤’에서는 “한 보자기 눈물을 싸서 뿌리면/ 열 보자기의 별들이 떨어지던/ 소년의 언덕에도/ 오늘밤 싸락눈이 내리겠지”라고 한다. 사뭇 아름다운 상상이다. 시가 사람을 닮았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문장이 곧 그 사람이라는 선인들의 말씀을 여러 번 생각했다.

이렇듯 정군수 시인은 계절이나 식물, 또는 무생물의 현상에 자신의 서정적 자아를 투영하는데 탁월한 숙련공이다. 시 ‘복수초 뿌리와 발레리나의 발’에서는 눈 속에서 힘들게 꽃을 피우느라 복수초 뿌리가 삐뚤어졌을 것이라는 상상과 발레리나의 삐뚤어지고 옹이가 박힌 발을, 시 ‘칡꽃’에서는 밧줄에 몸을 매달고 오십 층 고층빌딩을 닦는 사내와 무인도 절벽에서 꽃을 피우는 칡꽃을, 시 ‘찔레꽃’에서는 가시내를 상상한다.

벙어리 할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눈먼 할아버지가 하루에 세 번
식당으로 간다

한 팔이 없는 할아버지가
발이 뭉그러진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화장실에 간다

요양원 복도에서 그들이 만났을 때
억새꽃이 억새꽃을 보고
몸을 흔든다
- ‘억새꽃이 억새꽃을 보고’ 전문


노인들의 흰 머리카락을 억새꽃에 비유하고 있다. 억새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대유한다. 내용에서 벙어리와 봉사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둘 사이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자연스럽다. 억새밭에서 억새꽃이 억새꽃을 보고 몸을 흔드는 것과 같다.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에게 자연스러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 ‘문인화’는 폭설에 가지가 부러진 소나무를 눈 덮인 산이 “에워싸고/ 비경을 만들어주”는, 자연의 위엄을 한 폭의 동양화로 보여준다. 시 ‘수목장’에서 화자는 나무에게 “당신과 한 몸이 되”게 “나를 받아주어서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가지 끝에 피는 순한 눈과/ 겨울을 나는 억센 근육을 보고/ 눈물이 헛것인 줄” 아는 자연의 무상함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시 ‘미안하다’에서 “잃어버린 친구가 그리운 밤/ 울지 못하는 나는/ 개구리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정 시인은 1996년 등단했다. 5번째 시집이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김제고등학교에서 신석정 시인을 스승으로 만나 시와 인연이 됐다고 한다.

◇초록배추 애벌레=정군수 지음. 인간과문학사 펴냄. 154쪽/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