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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관동팔경의 제1경, '죽서루'를 가다

<84> 관동팔경의 제1경을 가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7.10.2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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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죽서루 전경.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죽서루 전경.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언젠가 가봐야지 벼르면서도 쉽사리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 내게는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 절벽 위에 위치한 죽서루가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소위 양반이라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누각이나 정자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죽서루만큼은 꼭 한번 가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죽서루가 마음에 들어온 것은 오래전에 읽었던 조선 중기의 문신 허목(許穆)이 남긴 ‘죽서루기(竹西樓記)’ 때문이다. 이런 대목이었다.

‘동계(東界)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나 역시 궁금한 게, 무엇 때문에 죽서루를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얼마 전에 마침 삼척에 강연을 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일부러 하루를 묵기로 했다.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죽서루를 들러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죽서루를 찾았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저만치 우뚝 서 있는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곳의 누각보다 꽤 크고 웅장해 보였다. 바로 누각 쪽으로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다. 무엇이든 무조건 안으로 들어가면 놓치는 게 많기 마련이다. 멀리서 조망하면서 주변과의 어울림을 살피고, 조금씩 가까이 가변서 변화를 보고, 비로소 안으로 들어가야 전부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죽서루에서 내려다본 오십천.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죽서루에서 내려다본 오십천.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신을 벗고 누각 안으로 들어가자 옛사람의 정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화석처럼 새겨놓은 고색창연한 기둥들, 그리고 숱한 시가 적여 있는 현판들…. 오래전 다녀간 사람들의 숨결이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을 하나씩 가슴에 새긴 뒤에야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가슴이 뻥 뚫린다’는 말은 그런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겠지? 시원한 풍경이었다. 절벽 아래로는 오십천이 유유히 흘렀다. 가을을 안은 강물은 하늘을 닮아 푸르게 깊어져 가고 있었다. 왜 죽서루를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았는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안내서에 의하면 죽서루는 조선 시대 일종의 관아시설로 쓰이던 누각이었다. 즉 삼척부의 객사(客舍)였던 진주관(珍珠館)의 부속건물이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접대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물론 삼척 지방 양반 사대부와 삼척을 찾는 시인 묵객들의 휴식공간으로도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서루, 혹은 죽루라고도 불린 죽서루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누각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져 오고 있다. 일설에는 죽죽선이라는 기생의 집이 누각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기록으로 보면 고려 명종 대의 문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 중에 죽서루와 관련된 것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12세기 후반에 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죽서루는 고려 말 조선 초 혼란기에 허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사였던 김효손(金孝孫)에 의해 옛 터에 다시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문바위 위에 있는 성혈유적.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용문바위 위에 있는 성혈유적.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죽서루에 가면 꼭 들렀다 오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 있다. 누각을 정면으로 볼 때 왼쪽(동쪽)으로 가면 만나는 용문바위와 성혈유적이 바로 그곳이다. 용문바위는 바위 한가운데가 문처럼 뚫린 큰 바위인데 행초서로 ‘龍門(용문)’이라고 새긴 음각 글씨가 남아 있다. 바위 위로 올라가면 성혈유적을 볼 수 있다. 성혈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선사시대의 상징물이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는 민간신앙으로 정착되어 득남의 기원처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부녀자들이 칠월칠석날 자정에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린 뒤 그 좁쌀을 치마폭에 감춰 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는 신앙이다. 용문바위의 성혈은 크기가 3~4cm 정도 되는 10개의 구멍이 있다.

옛사람들이 품었던 소망의 흔적을 잠깐 들여다보는 것 역시 여행이 지닌 매력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관동팔경의 제1경, '죽서루'를 가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10월 27일 (16:57)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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