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통합검색
경제신춘문예 (~12.08)KMA 2017 모바일 컨퍼런스 (~11.23)
세상과 잘 사는법, 내가 잘 사는법 - 네이버 법률
시인의 집 관련기사124

[시인의 집] 경배하라, 외롭고 쓸쓸한 영혼을 구원하는

<124> 함태숙 시인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7.11.04 13:27
폰트크기
기사공유
[시인의 집] 경배하라, 외롭고 쓸쓸한 영혼을 구원하는

등단(2002년 ‘현대시’) 15년 만에 첫 시집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를 낸 함태숙(1969~ )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여전히 살아 있고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죄스럽다”고 했다. “조금은 외롭다”고도 했다. ‘죄스럽다’와 ‘외롭다’는 이번 시집 전체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말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살아 있음의 죄의식과 외롭고 쓸쓸한 삶의 연민을 드러낸다.

일용직 아버지가
상견례에 입을 옷을
차마 자식이 준 돈을 쓰지 못해서
훔쳐 입었다
평생의 땀방울은
구만구천 원, 굴욕보다 헐값이어서
어깨 굽은
부성, 죄악 같은
그 위에 근엄한 대형마트의 성채가 들어서서
도덕적인 지폐와
반짝이는 크레디트카드들이 일제히
형량을 정한다
찌이ㅡ익 찌익, 목숨을 선고한다
저 붉은 떨고 있는
눈물
수컷의 상처를 보면서도
세계는 왜 아직도 파산하지 않는 거냐?
- ‘저 붉은 떨고 있는’ 전문


결혼 전, 양가 상견례에 입을 옷을 사 입으라고 아버지에게 돈을 줬는데, 자식이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기에 아버지는 쓰지를 못한다. 변변한 옷 한 벌 없는 아버지는 결국 옷을 훔치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 가난한 아버지는 옷값 ‘구만구천 원’ 때문에 평생 당한 굴욕보다 더 큰 굴욕을 당한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을 것이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게 빌었을 것이다. 본인이 보호자이면서 보호자(자식)를 불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훔치려 했던 옷을 사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흘린다. 돈도 아까웠지만, 그보다는 자식 앞에서 부끄러웠고, 죄스러웠고 가난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평생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견례에 입고 갈 옷 한 벌 때문에 평생 쌓아온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집에 와서는 자식에게도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국 돈이다. 가난이다. 변변한 기술 없이 일용직으로 공사판을 떠돌았으므로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자식은 또 가난을 물려준 아버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애처롭다. 원망은 결국 세상으로 향한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영혼은 우다닥 옷을 껴입고
포장마차 찌그러진 탁자를 괴고 온 밤 내 붉어지도록 술을 마시면서

왜전화안받아잘못했어요수신거절풀어주세요난여기서얼어죽어버릴거야ㅡ

이런 추태쯤 부려야 눈이 온 거지 술병 하나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눈보라를 잔뜩 이고 술병 속에 제 영혼을 처넣고는 와야, 그쯤은 돼야 폭설인 거지

사랑은 그런 동사들 아닌가
눈 내린 다음 날

우두둑 동사한 새들처럼
- ‘폭설의 다음’ 전문


살아 있음의 죄의식은 고스란히 술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러들인다. 폭설이 내리던 날 폭음을 하며 “수신거절”하고는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 외에 무엇으로 나를 집중시킬까”(‘시인의 말’)라고 했지만 “사랑은 그런 동사들”, 즉 죽음보다 깊은 것이다. 실상 죽음 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비밀을 숨긴 트릭 같은”(이하 ‘초록 물컵 위에 앉아’) 것인지라 내 영혼은 “뽀얗게 먼지가 쌓여” 갈 뿐이다.

표제시 ‘지구를 끌어안고’에서 보듯, 외롭고 쓸쓸한 시인의 영혼은 ‘우주’와 만난다. “제일 먼 길로 돌아서”(‘명왕성’) 겨우 만난 사람을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이하 ‘잠실’)지만 결국 “온 생을 다하여 상처받을 것”임을 직감한다. 우주에 빛과 어둠이 있듯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또한 “은총과 재앙”이라는 대척이 공존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이별이 될 수 있다. 이별은 부부라는 대칭, 즉 힘의 균형이 깨짐을 의미하고, 꽃을 피울 수 없는 조건이 된다. 사랑은 결국 환멸과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속의 가장 빛나는 영토를
가져가시고
물고기 한 마리를 내리소서
대지의 어머니가 기원하자
생살이 찢어지며
빗물이 내리쳐
젖은 채 타오르는 강이 생겼다
태양은 일천 개로 부서지고
눈이 멀 정도로 반짝이는 물비늘
대지의 어머니가
둥글게 몸을 말자
그 딸들도 모두 몸을 궁굴려
출렁이는 신의 영토.

여기, 물고기가 한 마리 놀고 있다.

경배하라.
- ‘회임’ 전문

환멸과 파멸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새 생명밖에 없다. 시 ‘회임’은 생명 잉태의 순간을 “물고기 한 마리”로 포착하고 있다. “내 속의 가장 빛나는 영토”에 들어선 생명은 “눈이 멀 정도로 반짝”인다. 어느덧 배는 불룩해지고 뱃속에서 파닥파닥 놀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새 생명이 내 배 속에 있는 순간에는 외롭고 쓸쓸함이나 죽음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기쁨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경배하라”, 이 한 마디에 살아 있음의 죄의식도, 가난의 부끄러움도, 오래 기다려온 시간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생명이 지닌 속성이다. 사실 시도 그렇다. “아직 세상에 안 나온 좋은 글을 많이 가지고 있”(이하 ‘구름의 청탁’)는, 시를 회임한 시인은 “한 줄의 시가 영혼”(‘시인의 말’)임을 잘 알기에 상처 많은 삶을 견디고 있다.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함태숙 지음. 한국문연 펴냄. 122쪽/ 9000원

[시인의 집] 경배하라, 외롭고 쓸쓸한 영혼을 구원하는

  • 0%
  • 0%


오늘의 주요뉴스



종료된칼럼

베스트클릭

실시간 급상승

10초

5분간 수집된 조회수 기준

오늘의 운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