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인간은 허공에 떠도는 한 점 먼지

한 폭의 겨울 풍경화를 연상하게 하는 시다. 시집을 읽어가는 내내 유려한 문체와 조탁된 아름다운 문장, 퇴고와 절차탁마를 통한 자연스러운 문맥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산골짜기의 물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받아 적는 것이다. 골짜기에 허리가 굽은 작은 나무들은 계곡이 받아 적은 새의 노랫소리를 계곡에서 건져내고 있다. 하늘의 구름은 계곡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려다본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골짜기의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겨울 풍경화다.

이처럼 자연과 인사가 함께 어울리는 이태수 시의 심상은 맑고 밝다. 읽어가는 동안 독자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우중충한 기운이란 없다. 시 ‘오월아침의 한때’에서 보여주는, 이를테면 “오월 아침나절의 촉촉한 실비,/ 교외의 작은 마을은 수묵담채화 같다// 야트막한 지붕들을 감싸 안은 물안개,/ 마을 초입의 토담집 낮은 담장에는/ 줄장미 꽃잎들이 유난히 새빨갛다// …(중략)…// 순간, 잊고 있던 옛 꿈이/ 햇살 받으며 유리알처럼 반짝인다”와 같은 맑고 반짝이는 심상이 가득하다.

또 시 ‘장마 그치고’에서는 “하늘에 걸려있는 무지개” “풀잎에 글썽이는 빗방울들” “발에 힘을 주며 뛰어내리는 햇빛” “나무들은 허공으로 팔을 쭉쭉 뻗는다”는 동적 심상이 독자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이태수 시인은 194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따듯한 적막’은 열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의 시들을 쓰는 동안 길 위에서 홀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노라면 적막마저 그윽해지는 것 같았다는 고백도 한다. 그리고 이 시집을 마음 가난하고 적막한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한다. 제목이 ‘따뜻한 적막’인 이유다.


한차례 스치고 간 게릴라성 비,
외딴집 마당가 낮은 쥐똥나무 울타리에
마른 쥐똥처럼 햇살이 반짝인다

그 아래는 이빨 빠진 개밥그릇 하나,
개는 마을로 바람 쐬러 갔는지
멧새들이 불어터진 밥알들을 쪼아 댄다

물 한 사발 얻어 마시러 들렀건만
아무도 없는 빈 집,
울타리 곁에 앉아 젖은 옷을 말린다

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 몇 점,
개 짖는 소리에 더욱 목이 마르다
- ‘외딴 빈 집’ 전문

소나기가 다녀간 외딴집, 마당가 쥐똥나무 울타리, 이빨 빠진 개밥그릇, 개밥그릇에서 밥알을 쪼아 먹는 멧새들, 하늘에 한가로운 구름, 개 짖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이는 공간의 시다. 비가 온 후라 쥐똥나무 잎에 매달린 햇살이 쥐똥처럼 반짝인다. 시인은 이런 반짝이는 것에서 무상이라는 자연과 인생의 원리를 본다.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고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다. 인간의 근원을 묻는 사유방식이다.

사유의 결과 자신이 ‘허공의 점 하나’임을 인식한다. 길은 가도 가도 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고 해도 또 다른 산과 강이 기다리는 “아득한 무명”일 뿐이다. 실재로 가는 것 같지만 가는 게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우주 안의 일이다. 그러니 인간은 공활한 허공에 떠도는 한 점의 먼지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다. 시집의 마지막 시 ‘지나가고 떠나가고’는 시집의 주제가 된다. 바람이든 자동차이든 사람이든 계절이든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가는 것 앞에서 한 점 먼지에 불과한 화자는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을 뿐이다.

◇따뜻한 적막=이태수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128쪽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