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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128> 유정이 시인 ‘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7.12.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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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유정이(1963~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골목(당신)을 지나 한 줄기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골방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한 영혼의 슬픈 내면을 다루고 있다. 검은 천으로 막힌 골방 유리창은 캄캄하고, 간절히 유리창 밖에 귀를 기울이지만 간혹 들리는 소리는 나를 더 절망하게 한다. 어두운 골목 혹은 골방에서 나를 꺼내줄 구원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소음과 총성 같은 고함이 신경을 자극할 뿐이다. 내 꿈과 사랑은 새벽 시간인데, 처한 현실은 저녁 시간이다. 새벽과 저녁의 간극에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고독과 외로움과 설움이 자리하고 있다.

검은 커튼을 사방으로 쳐놓고
당신은 너무 깜깜하지
멀거니 서 있던 가등街燈이
뭐라 뭐라 주억거렸다는 것을 알아
그 가녀린 불빛으로
어떻게 당신을 속속들이 누빌 수 있겠어

한결같이 당신에게는 골목이 많고
우리는 한결같이 어두웠어
계속해서 막아서는 양파껍질처럼
당신은 벗겨도 벗겨도 골목이라는 것
벗어날 수 없는 골목이라는 것

내 생을 골목의 한 때라고 말하지 않겠어
골목은 골목이어서 거기 있었고
당신이 골목이어서 나는 걸어 들어갔던 것
골목이어서 어둡고, 무겁고, 고요한 것
당신이 골목이므로
더 이상 당신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
- ‘고독은 골목과 같아서’ 전문

당신은 골목이고, 골목은 고독 같다. “당신이 골목이어서 나는 걸어 들어갔던 것”이지만 “내 생을 골목의 한 때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나는 현재 행복하지 않다. 우울하다.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나의 미래도 “어둡고, 무겁고, 고요”하기만 하다. “더 이상 당신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절망에 찾아든 것이 골방이다. 그곳에서 ‘다량의 위험한 물질’로 변하거나 하염없이 서럽게 울고 있다. 불을 밝혀줘야 할 가등(街燈)은 “멀거니 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결같이 어두웠”기에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지만 “계속해서 막아서는 양파껍질처럼/ 당신은 벗겨도 벗겨도 골목”이다. 들고남의 ‘터미널’조차 출구가 없는 “아가리 큰 입구”(이하 ‘순해지는 감정’)이므로 “밤새 싼 가방을 아침”에 풀고 만다. 끝내 이별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했지만 그것이 끝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울음의 미사’)기 때문이다. “세 번 네 번 윤회를 거듭”(‘부엌의 완성’)해도 당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다.

신발을 오래 신다가 당신을 놓친다
골목의 층층 계단마다 한 개씩 떨어진 그림자
수레를 기다리는 사이 발이 발을 어긋나
아무리 구부려도 수레를 신을 수 없어

수레는 내게 너무 큰 신발
당신은 내게 너무 네모난 신발

잠시 멈추어 있던 바퀴는 층층 계단에서
덜커덕거리는 저녁을 세워두고 간다

걸음이 느린 사람들은 수레를 타지 않아
당신은 너무 깊은 신발, 한 번 빠지면
나무처럼 키가 세워진다 하네

이마에 빨갛게 발열하는 꽃을 피우는 당신
울고 계십니까

울음 흩뿌리는 당신을 버리고
바닥을 타고 갈 시간,

깜깜한 밤을 어깨에 둘러메고
바깥을 향하는 당신,

수레가 우는 것 본 적이 있나요
- ‘수레가 우는 밤’ 전문


내 불행한 삶은 “톱밥 난로 위 김치찌개 졸아붙은 냄비 울음의 유전자를 끓이던 아버지”(‘경비원 아버지’)에 닿아 있지만 결정적 원인은 “신발을 오래 신다가 당신을 놓”쳤기 때문이다. 나에게 딱 맞는 신발(사랑)을 신었어야 하는데, “골목의 층층 계단마다 한 개씩 떨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가장 빛나는 시기와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 “발이 발을 어긋”나자, 즉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어쩔 수 없이 “내게 너무 큰”, “내게 너무 네모난”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 “내 생도 전반적으로 어두워”(‘오래된 극장’)졌다. 어긋난 만남은 나만의 불행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수레 같은 당신도 불행하게 한다. 당신에게 “울고 계십니까” 묻고 있지만 결국 나도 같이 울고 있는 것이다. 더는 떨어질 것 없는 극한상황과 “바닥을 타고 갈 시간”이 앞에 놓여 있다.

다시 당신에게 가 봅니다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너무 깜깜한 당신 때문에
외로움을 물컹 만지고 말았어요
순해지는 감정이 순간 딱딱해지고 말았어요
허물어진 계단 앞에서 생각하니
내 생도 전반적으로 어두워요
고작 내가 가진 반경만 익숙해질 뿐
필름은 가끔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여주는데
나는 왜 비가 오지 않나요
고개를 드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앉아 있나요
당신이 잘 열리지 않으니
닫히지 않는 것 당연해요
어두운 실내에서는 왜 소리죽여 울어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구보다 출구가 더 많다면
빛이 더 잘 새어드는 것,
한 번도 상영된 적 없으니
종영되지 않는 것 당연해요
사과 씨를 삼키면 사과가 열릴까 걱정하는
밤이 길어집니다
오래된 극장을 삼켰으니 오늘 밤
늙고 쓸쓸한 연애가 가득 매달릴 거예요
- ‘오래된 극장’ 전문

나는 아프다. ‘아침은 어디서 오는가’와 ‘손가락 정원’이라는 시 두 편에는 ‘편두통’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귀에서는 자꾸 기차 바퀴 소리”(‘싸움의 기술’), 즉 지독한 이명에 시달리고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부정적 시각(검은 유리창, 까만 창, 깜깜한 밤, 검은 행방, 시커먼 시간 등)과 “너무 오래 듣지 못하는” 소리(귀)는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는 것을 보여준다. 몸과 마음은 유리창처럼 쉽게 깨진다. 이 모든 게 내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당신의 모든 취향을 추종”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이 그리워 ‘유리창 밖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건 본능이다. 사랑의 허기다. 나의 병은 사랑의 부재에서 생긴 것이다.

사랑하려 “다시 당신에게 가”보지만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나도 외롭고 당신도 외롭다. 애써 좋았던 감정도 다시 “딱딱해지고 말았”다. 사랑도, 그나마 남았던 정(情)도 그리고 미래도 허물어지고 만다. “고작 내가 가진 반경만 익숙해질 뿐”이고, 당신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화해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의 마음이 통해야 한다. 절망에 빠진 나는 “소리죽여” 운다. 사랑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사랑을 끝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고독한 밤이 길어진다. “늙고 쓸쓸한 연애”가 새삼 아프다.

◇나는 다량의 위험한 물질이다=유정이 지음. 세상의 모든 시집 펴냄. 128쪽 /1만원

[시인의 집] 오늘도 당신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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