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고운 햇살가루를 눈두덩에 살그머니

김선아의 시 ‘명필’은 아마 어느 구체적인 서예가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서예로 대유되는 예술이라는 것이 현실 삶과 닿아야, 또는 구체적 삶의 살림살이에서 태어나야 진정한 예술이라는 비유일 것이다. 예술의 갈래인 시 역시 마찬가지라는 암시이기도 하고 시인이 터득한 시론의 집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실에서 관념으로 전승되는 서예 기법을 공부하고 인정받아 전시를 준비하던 서예가가 군밤장수의 삶이 묻어 난 글씨를 보고 진정한 글씨가 무엇인지 깨닫듯, 인생살이의 구체성과 떨어진 관념에 사로잡힌 시 역시 진정하지 않다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시집 속의 다른 시들과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시론을 오롯이 담아놓은 그릇이다.

시 ‘독락’은 구체적 경험을 발효한 관념을 형상한 시다. 한 봉우리로 솟아오른 무덤에서 발상하였을 것이다. 한 봉우리로 솟아오른 무덤도 보면 칸칸 두 구덩이로 묻은 것이다. 당연히 오장육부도 따로따로 기능을 달리하며 한 몸체를 이루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기능을 멈추면 죽는 것이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무리 외로워도 “겹겹의 빗장”을 쳐서 가두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어떤 마술’은 인간관계를 종이에 비유하고 있다. 한 장 종이는 쉽게 찢기지만 낱장과 낱장을 마주 끼워놓은 책 두 권의 마찰력은 기중기 두 대를 동원해도 떼어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통해 나와 너의 가엾음과 안쓰러움, 외면과 위로, 애증이 서로 러브샷 하듯 깍짓손을 끼듯 어울려야 하는 게 세상이라는 것이다. 시 ‘싸다, 싸’는 사건의 구체화를 통해 자기 성찰과 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파라곤 지하 사우나에서였다.
벌겋게 갈라터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오목교역 지하 계단에서 구걸하던 바로 그 노파였다.
비누를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등을 밀어달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영 불편하였다.
얼른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러다 그만 빙판길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싸다, 싸.

겨울바람이 박장대소하며 엉덩방아를 자꾸자꾸 흉내 내는 것이었다.
- ‘싸다, 싸’ 전문

파라곤 지하와 오목교라는 장소, 사우나와 구걸이라는 행위, 화자가 사우나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와서 걷다가 빙판길에서 넘어지는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화자는 오목교역 지하 계단에서 벌겋게 갈라 터진 손으로 구걸하고 있는 노파와 같은 장소에서 사우나를 하고 있다는 것에 역겨움을 느껴 사우나를 빠져나온다.

이러한 너와 나, 구체적으로는 거지인 나와 교사인 나는 다른 신분이라는 차별심은 자연이 마련한 빙판길에 의해 엉덩방아로 결론이 난다.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사회적 신분으로 인간을 구분하는 차별심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형식을 장소와 행위, 사건을 통해 적실하게 구성하고 있다.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시인은 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서정주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2011년 등단하였고, ‘얼룩이라는 무늬’가 첫 시집이다. 시 ‘서산 마애불’의 뒷부분, “둥두렷한 광대뼈가 그곳 부처님의 눈 아래쪽에서 화들짝,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처님은 딸아이의 광대뼈는 본척만척, 눈 속 물빛 영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빙그레, 고운 햇살 가루를 눈두덩에 살그머니 묻혀주는 것이었다.”는 능청과 멋이 서정주의 제자답다.

◇얼룩이라는 무늬=김선아 지음/황금알/112쪽/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