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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의 길위의 편지]북유럽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8.01.06 09:27|조회 : 6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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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에 캠핑카를 타고 북유럽을 여행하던 때였다. 원래는 스웨덴의 키루나라는 도시에서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지만, 폭설 때문에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막혀있었다. 전기를 쓸 수 있는 캠핑장을 찾아봤지만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었다. 하긴 죽을 작정을 한 게 아니라면, 그 폭설 속에 누가 캠핑카를 몰고 설원을 달릴까. 말 그대로 ‘무식해서 용감한’ 동양인들이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삶과 죽음은 가까운 곳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굳이 사고의 원인을 따지자면 폭설 속의 무리한 운행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운전만 한 프랑스인 브노아가 허기에 지쳤는지 사과라도 달라고 요청했다. 사과 하나를 깎아서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차가 두두두두 요동치더니 쿵!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처박혔다. 직감적으로 대형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임대해서 북유럽 투어를 했던 캠핑카/사진=이호준 여행작가
프랑스 파리에서 임대해서 북유럽 투어를 했던 캠핑카/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둘러보니 차가 눈구덩이 속에 빠져 있었다. 브노아의 신경이 잠깐 분산된 사이 미끄러지면서 제멋대로 뛰쳐나간 것이었다. 크게 다친 데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는 무사할까? 시동을 걸어보니 몇 번 쿨럭 거리며 기침을 하더니 별 탈 없이 걸렸다. 길 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눈 속에 박혔으니 망정이지, 가로수를 들이받았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면 살아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눈 속에 처박힌 차를 어떻게 꺼낸담? 문을 억지로 열고 나가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차는 도로 옆 눈 더미 속에 반쯤 묻혀있었다. 갈 길은 먼데, 속 모르는 눈은 계속 내려 쌓이고…. 바퀴 주변의 눈을 손으로 퍼내봤지만 장비도 없이 높이 쌓인 눈을 치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대책이 없으니 그 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바퀴 옆의 눈만 간신히 치우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봐도 차는 요지부동이었다. 기온은 자꾸 떨어지는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 순간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구세주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승용차 한 대가 서더니, 부부가 함께 내려와서 무언가 해 보려고 이리저리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고립무원의 설원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할 기색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안 되니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고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길 가의 차들이 눈에 덮인 가운데 제설차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길 가의 차들이 눈에 덮인 가운데 제설차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드디어 트럭 두 대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한 운전사들은,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로프를 캠핑카의 뒤에 걸고 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나 단단히 박혔는지 차는 꼼짝도 않고 로프가 툭 끊어지고 말았다. 이리저리 틈을 찾던 트럭 운전사가 끝내는 눈을 파헤쳐가며 차 밑까지 들어가 누웠다. 다른 쪽에서 로프 걸 곳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작은 트럭의 힘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트럭 운전사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지나가는 대형 트럭을 세워 잠깐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큰 트럭이 당기자 고집스럽게 버티던 캠핑카가 터덜터덜 끌려나왔다. 설명으로는 금방인 것 같지만, 사고를 당하고 캠핑카를 끌어내기까지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길 위에 차들이 수십 대 서 있었다.

끝까지 남아있던 트럭 운전사가 급한 걸음으로 자기 차로 돌아가더니, 인사를 차릴 틈도 없이 출발했다. 큰 소리로 고맙다고 외치니 손을 한번 흔들 뿐이었다. 대체 저 사람과 나는 무슨 인연이 있길래, 아무 대가도 없이 도움을 주는 것일까. 시간을 아낌없이 버리고, 맨손으로 눈구덩이를 파헤치면서 차 밑으로 들어가고, 다른 운전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차에 들어와 앉으니 전신이 흠뻑 젖어있었다. 그날 밤은 결국 근처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아침 겸 점심식사로 햄버거 하나 먹은 게 전부였지만 저녁식사를 준비할 기운도 먹을 기운도 없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살아 있다는 것, 두 눈 뜨고 내일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2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눈이 많이 내리면 그날이 생각난다. 무모했던 도전과 그 결과로 일어난 사고, 정말 막막했던 순간…. 물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몸 안 사리고 낯선 이방인을 도와준 뒤, 훌쩍 떠나간 북유럽의 트럭운전사들이다. 세상은 절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운 날이었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북유럽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1월 5일 (15:2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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